![]() |
LG트윈스 토종 에이스 임찬규. 사진=연합뉴스 |
[이데일리 스타in 이석무 기자] 느린 공으로 타자들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모습이 마치 ‘흑마술’을 부리는 것처럼 보인다. 공은 결코 빠르지 않은데 타자들은 꼼짝 못한다. 시속 100km도 안되는 슬로우 커브에 혼이 빠질 지경이다. 주인공은 LG트윈스 토종 에이스 임찬규(32)다.
2011년 LG 유니폼을 입고 프로에 데뷔한 임찬규는 프로 15년차인 올해 최고의 활약을 펼치고 있다. 시즌 개막 후 3경기에 선발 등판해 3승 무패 평균자책점 0.83을 기록 중이다. 21⅓이닝을 던져 피안타는 14개만 내줬고, 볼넷은 5개만 허용했다. 13일 기준 다승은 공동 1위고 평균자책점은 제임스 네일(KIA·0.36)에 이어 2위다. 토종 선발투수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활약이다.
경기 기록을 뜯어보면 더 놀랍다. 시즌 첫 등판이었던 지난 달 26일 한화이글스전에선 9이닝 2피안타 무실점 완봉승을 따냈다. 토종 투수가 완봉승을 거둔 것은 2022년 6월 11일 고영표(KT) 이후 2년 9개월 만이었다.
4월 3일 KT위즈전에서 5⅔이닝 1실점으로 2승째를 거둔데 이어 10일 키움히어로즈전에서도 7이닝 1실점 호투로 시즌 세 번째 승리를 따냈다. 특히 키움전에선 4회말에 공 9개로 3구 삼진 3개를 잡는 괴력을 뽐내기도 했다. 프로야구 역사상 10번째 나온 진기록이었다.
임찬규는 강속구를 던지는 투수가 아니다. 야구 기록 전문 사이트 ‘스탯티즈’에 따르면 올해 임찬규의 직구 평균구속은 시속 140.5km에 불과하다. 규정이닝을 채운 선발투수 가운데 최하위권이다. 임찬규보다 직구 평균구속이 낮은 선수는 언더핸드 기교파인 고영표 뿐이다.
숫자로 나타나는 구속은 중요하지 않다. 타자들이 느끼기에 임찬규의 직구는 훨씬 강력하게 느껴진다. 제구가 뒷받침되기 때문이다. 상하좌우로 원하는 곳에 공을 뿌리다보니 쉽게 공략당하지 않는다.
게다가 임찬규에게는 커브와 체인지업이라는 강력한 무기가 있다. 특히 시속 100km도 안되는 초슬로우 커브로 타자들을 현혹시킨다. ‘아리랑볼’ 같은 느린 커브 다음에 던지는 시속 140km대 직구는 체감상 150km 이상의 위력으로 다가온다. 이런 완급조절로 상대 타자의 타이밍을 뺏는다. 조금 과장하면 ‘타자를 가지고 논다’고 할 수 있다.
통산 평균자책점 4.47에서 알 수 있듯 임찬규는 지난해까지 최정상급 투수는 아니었다. 2023년 개인 최다승 14승(3패)을 비롯해 시즌 10승 이상을 네 차례 기록했지만 ‘에이스’라고 하기엔 부족했다.
올 시즌은 다르다. 완전히 투구에 눈을 떴다. 프로 무대에서 15년간 꾸준히 활약하며 쌓아온 관록이 드디어 꽃을 피우고 있다
염경엽 LG 감독은 “(임)찬규가 생각을 바꾼 것이 주효했다”고 성공 비결을 소개했다. 그는 ”예전 찬규는 구속과 계속 싸웠다. 그래서 ‘스피드와 싸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딱 한마디 조언을 건넸다”며 “생각을 바꾸니 해마다 좋아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최정상급 선발투수로 발돋움한 임찬규는 “다른 생각 없이 공 하나 던지는 것에만 집중하니 조금씩 성장하더라”며 “위기가 와도 공 하나에만 집중하면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이어 “타자를 맞춰잡는 ‘피네스 피처’들은 조금만 흔들리면 어쩔 수 없이 ‘구위’ 얘기가 나온다”며 “결국 외부 평가나 시선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것에만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밖에서 보기에 임찬규는 공을 툭툭 던지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쉽게 던지면 마흔 살까지 선발투수로 활약하겠다’고 농담을 던졌다. 그러자 임찬규는 “저 툭툭 안 던진다”며 발끈(?)했다.
임찬규는 “보기에는 쉬워 보여도 정말 열심히 던진다. 그렇게 쉽게 사는 인생 아니다”며 입담을 과시했다. 그의 말처럼 지금의 활약은 지난 15년간 치열하게 고민하고 좌절하면서 스스로 깨달은 끝에 이룬 결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