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감으면 열리는 침묵의 파티…소비의 도시에서 '독자'로 사는 법 [유지혜의 우연한 뉴욕]

2 days ago 9

ⓒ유지혜 작가

ⓒ유지혜 작가

뉴욕을 걷다 보면 골목마다 늘어선 줄을 마주치게 된다. 날씨만큼이나 흔한 스몰토크는 줄의 정체를 묻는 일이다. “뭐 때문에 줄 서 있는 거예요?” “말차 라떼 팝업이요.” “더 로우(The Row, 올슨 자매가 만든 럭셔리 브랜드) 가방을 200달러에 판대서요.” “금요일 밤마다 무료 입장이거든요.”

뉴욕에 산다는 건 별의별 줄에 대기하는 일이라고 누군가는 말한다. “요즘은 기다리는 행위 자체가 뉴욕스러운 일처럼 느껴져요. 모퉁이만 돌면 단지 미용실에 들어가려고 길게 줄을 서 있으니까요.” 뉴욕 포스트에 실린 어느 주민의 증언처럼, 줄 서기는 뉴욕만의 문화이자 현상이다.

나 또한 여러 종류의 기다림을 겪었다. 가령, 껄렁대는 소년들 사이 슈프림 매장이나 자정의 타코 트럭 등에서. 하지만 도서관 앞에서 한 시간 이상을 기다린 적은 처음이었다. 거대한 건물 하나를 에워쌀 만큼 대기 행렬이 이어졌다. “이거 무슨 줄이에요?” 앞에 선 백인 여자는 자기한테만 질문이 온다고 투덜대면서도 안내자를 자처하고 있었다. “오늘 도서관에서 책 읽는 파티를 하거든요. 그래요.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최고로 괴짜스러운 활동이라고 할 수 있죠.”

파티는 뉴욕 공립 도서관 맞은편에 위치한 분관 SNFL(Stavros Niarchos Foundation Library)에서 열렸다. 마침내 입장했을 때는 행사 종료까지 채 한 시간이 남지 않은 시각이었다. 책 덕후로 알려진 뉴욕 출신 배우 제시 아이젠버그도 이미 다녀간 지 오래였고, 무료로 나눠줬다는 굿즈가 든 토트백도 재고가 소진된 상태였다. 초반에는 책과 관련한 다채로운 활동들, 이를테면 디제이 부스와 DIY 코너, 글쓰기 수업, 북토크 등으로 꾸며졌다(고 들었다). 입장이 늦은 사람들은 이전 방문객이 쓸고 간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남은 재료를 사이좋게 뒤적이고 있었다.

생각보다 허술한 행사에 실망한 건 나뿐이었는지, 아니면 그들 모두가 기획이 동난 자리에도 ‘읽기’라는 본질은 남아 있다는 것을 알 만큼 의연한 독자였는지는 모르겠으나, 2층 라운지에는 독서 중인 이들이 가득했다. 이들은 내게 만화가 에이드리안 토미네의 그림을 상기시켰다. 폭설로 비행기 운행이 지연된 공항 대기실에서 모두가 책을 읽고 있다. 핸드폰의 자리에 책을 그린 것이다. 다른 그림도 떠오른다. 관광버스에 탄 사람들은 사진을 찍는 데 여념이 없는 와중에 맨 뒷칸에 앉은 소녀만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책에 빠져 있다.

눈을 감으면 열리는 침묵의 파티…소비의 도시에서 '독자'로 사는 법 [유지혜의 우연한 뉴욕]

문제는 그 버스가 7번가의 명소 라디오 시티를 지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골목마다 눈길을 빼앗기는 뉴욕에서, 책에 몰두하는 모습은 비현실적인 동시에 비효율적으로 보인다. 물론 이 그림을 보이는 그대로 믿는 이는 없다. 그림은 정반대의 현실을 역설하고 있으니까. 관광객이 아니더라도, 뉴욕에 있는 그 누구든 손만 뻗으면 24시간 허락되는 자극에 유혹된다. 뉴욕은 소비자가 되기 가장 쉬운 도시이다.

그러나 맨해튼 한복판에서 소비자가 아닌 독자가 되기를 선택한 이들이 있다. 파티, 샘플 세일, 뮤지컬, 데이트 등 흥미진진한 수백 개의 다른 선택지에 눈 감은 이들, 소위 ‘잠들지 않는’ 이 도시에서 눈을 돌리기로 작정한 이들이다. 소비자의 반대말이 독자라면, 뉴욕에 사는 독자는 세상 어느 곳보다 강력하게 저항하고 있는 이들일 것이다. 그날 밤 도서관 앞에 가장 긴 줄을 만든 이들의 표정은, 80% 세일 소식에 모여든 고객들의 열의와 다를 바 없었다. 행사의 효율보다 중요한 것은 책 때문에 건물 하나를 에워쌌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최근 뉴욕에서는 책 읽기가 유행하고 있다. 한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각자 책을 읽고 이후 대화를 나누는 일명 ‘리딩 파티’는 줄줄이 매진된다. 이날 도서관과 협업한 ‘리딩 리듬(Reading Rhythms)’은 ‘리딩 파티’ 유행을 이끄는 단체로, 독서에 ‘파티’라는 새 이름을 붙였다. 열정적인 침묵이 한데 모일 때 파티만큼 뜨거울 수 있다는 것이다. 독립 서점이 이례적으로 늘어난 곳도 뉴욕이다. 미국 서점 협회 자료에 따르면, 팬데믹 이후 독립 서점 수는 전국적으로 300개 이상 증가했으며, 2025년에는 약 422개의 독립 서점이 새로 문을 열었다. 전년 대비 31% 성장한 수치다.

그 변화는 1년에 절반만 체류하는 내가 실감할 정도다. 독립 서점 맥낼리 잭슨(McNally Jackson)이 확장 이전했다는 것을 전해 들었던 날, 쨍하게 닦인 유리문을 열고 바글바글한 인파를 마주하던 날의 뿌듯함을 잊을 수 없다. 맥낼리 잭슨은 2004년 놀리타가에 처음 문을 열어 뉴욕의 대표 서점으로 성장했으나, 규모와 달리 서점의 소박한 영혼은 그대로였다. 섬세하게 큐레이팅된 책들에는 여전히 대형 출판사의 광고가 섞여 있지 않았다. 그곳에 가면 언제라도 패티 스미스의 사인본을 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서재 사이를 돌아다니는 것만으로 소속감을 느낄 수 있었다.

어느 순간 사라질까 염려했던 작은 서점들이 속속들이 늘어나는 일도 목격했다. 서점들은 각자의 개성을 생존전략으로 삼았다. 그래서 같은 책을 사도, 굳이 그 서점에서 사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로어이스트 오차드 가에 위치한 ‘Pickle Bookstore’는 직접 만든 피클과 제작 스웻셔츠를 판매한다. 웨스트빌리지의 ‘Three Lives &Company’는 사진 찍기와 소음으로 오염되지 않는 고요한 분위기를 유지하는데 힘쓴다. 그린포인트의 서점 ‘WORD’는 각자의 ‘최애’ 책을 통해 인연을 연결하는 게시판을 운영한다. ‘어떤 책을 읽느냐’가 데이팅 앱의 프로필보다 그 사람을 더 정확하게 설명해 주기 때문이다.

책을 컨셉으로 한 바에도 사람이 넘친다. 이스트 빌리지의 ‘북클럽 바(bookclub bar)’는 혼술하며 독서하는 컨셉으로, 새벽 2시까지 문을 연다. 입장 방법은 단 두 가지다. 술을 한 잔 사거나, 책을 한 권 사거나. 뉴욕의 밤을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과 독서에 대한 열망이 뒤섞이는 밤마다 나는 그곳을 찾았다. 그러나 혼자 책을 읽고 있는 사람만큼 흥미로워 보이는 것은 없어서, 사람들은 읽기를 잠시 중단하고 서로에게 말을 걸었다. 한번은 달랑거리는 귀걸이를 착용한 베트남계 청년이, 어느 날은 속눈썹을 길게 붙인 여자가 서툰 한국어로 말을 걸어왔다. 상대가 누구든 대화의 수문을 여는 질문은 항상 다음과 같았다. “무슨 책 읽어?”

책이 있는 공간은 좋은 대화를 보장한다. 한번은 강가에 면한 서점에서 곱슬머리 직원과 대화를 나눴다. “그 책 정말 좋아요. 내 친구가 번역을 맡았어요.” 그렇게 나는 작가 벵하민 라바투트의 소설을 만났다. 같은 방식으로 폴 오스터의 신작과 덴마크 작가의 데뷔작, 1940년대에 나온 일본 종이접기 책 등 예상치 못한 책들을 접했다. 엉겁결에 알게 된 타인의 추천 리스트는 대체로 나를 놀라게 했고, 내 취향과 어긋나는 경우에도 실망감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 책들은 나만의 좋음을 벗어날 자유를 주었기 때문이다. 서점에서의 대화는 실패가 없다. 실패한다 해도 이야기는 남는다.

이러한 대화는 단순한 스몰토크를 넘어, 뉴욕의 독서 문화를 떠받치는 방식이기도 하다. 한때 상업서점의 상징이었던 반스앤노블스도 아날로그를 지향하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이미지를 얻었다. 90년대 영화 <유브 갓 메일>을 떠올려보자. 톰 행크스가 책임자로 연기한 ‘폭스 서점’의 모티브가 바로 반스앤노블스였다. 로맨스를 생략한다면, 영화는 새로 생긴 대형 서점이 로컬 서점들을 내쫓고 거리를 장악하는 내용이다. 맞서 싸우던 ‘모퉁이의 작은 서점’의 주인역 맥 라이언은 결국 엄마의 뒤를 이어 운영하던 서점을 폐점하고 대형 서점의 한 부분으로 편입된다.

그러나 현재 시점에서 두 서점은 한 편 아닌 한 편이 된 것 같다. 아마존 인터넷 서점의 등장 이후, 대결 구도는 대형 대 독립이 아닌 아마존 대 오프라인 서점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무한 알고리즘, 총알 배송, 균일가 정책 등 아마존의 공격적인 행보에 비하면 대형 서점과의 경쟁은 인간적으로 보일 지경이다.

공항만 한 아마존 물류 창고를 떠올릴 때면 그 책을 쓴 저자의 분투 같은 것은 떠오르지 않는다. 편의가 극단에 이르면 책을 고르는 과정에 녹아든 철학과 낭만이 증발한다. 어쩐지 책을 배반하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책이 아니라 세제를 사는 기분이랄까. 실제로 창고의 물건들은 로봇이 이동하기 가장 효율적인 동선에 맞춰 무작위로 섞여 있다. 가능성을 꿈꾸는 인간의 무질서가 아닌, 오직 효율을 위한 질서의 풍경 앞에서 인간의 직관은 부품으로 전락한다. 이러한 경각심은 피클 북스 주인이 손글씨로 적어 붙인 경고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영세 사업, 그러니까 인디 서점에서의 도난은 진짜 최악입니다. 훔치고 싶으면 아마존 서점에서 가서 훔치세요. 주소: 7 W 34 st입니다. 그들은 책에 대해 신경도 안 써요.”

아마존 오프라인 서점은 2022년 3월 모두 폐점했다. 이 글은 이전에 쓴 것으로 보인다.

아마존 오프라인 서점은 2022년 3월 모두 폐점했다. 이 글은 이전에 쓴 것으로 보인다.

반스앤노블스는 2018년부터 100개 이상의 지점을 폐점했다. 획기적인 전략으로 부활에 성공한 것은 2022년경으로, 경영가 제임스 던트(James Daunt)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대형 체인이 살아남는 비결은 대형 체인처럼 운영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대형 체인의 상업적이고 투박한 이미지를 ‘독립서점 같은’ 서점으로 둔갑시켰다. 출판사 광고 대신 직원들이 선별한 책과 직접 쓴 추천사를 진열했다. 진열 방식을 직원들에게 위임했다. 검색이 용이한 알파벳 순서 대신 주제별로 서재를 묶어 뜻하지 않은 책을 마주칠 수 있게끔 했다. 다시 말해, 알고리즘이 줄 수 없는 불편과 실패, 멈춤을 제공한 것이다.

아마존을 대항하는 전략으로 반스앤노블스는 인간미를 택했다. 인간다움은 목표를 향해 바로 뻗어나가기보다 에둘러 가는 과정에서 마주치는 모든 것들로 빚어진다. 마치 책이 그렇듯이. 우리는 두리번거린다. 요약된 인생이 아닌 우회하고 경유하는 삶을 사실 더 재미있어 한다. 직선보다는 구불구불한 서사, 비선형적으로 흐르는 시간, 우연히 만나게 되는 미지 같은 것을 말이다. 이것은 비단 서점만의 생존 전략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 시대를 버티는 방법은, 하루쯤 현대인답지 않게 사는 연습인지도 모른다.

언젠가 뉴욕에 살았다던 지인은 내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다시 뉴욕에서 산다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도시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삶을 살아보고 싶어. 소음을 뒤로 하고 나만의 고요함을 찾는 생활을.” 그는 내게 ‘독자’처럼 보였다. 눈앞에 쏟아지는 쉬운 세상을 거부하는 사람. 책은 그런 이들에게 세계보다 더 큰 사치를 약속한다. 여기서 벗어나지 않고도, 어디로든 갈 수 있다고.

읽는 이를 훔쳐보는 나는 그 얼굴이 도착한 곳을 모른다. 그는 다만 독자. 그러나 기다림을 끝낸 얼굴이라는 짐작은 있다. 그는 이제 욕망이 줄 세우는 뉴욕의 거리가 아닌 어딘가에 있다. 이는 세상의 모든 독자에게 유효하다. 독자는 대기자의 신분에서 벗어난다. 언제든 프리 패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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