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날, 어버이날 앞두고 만난 장기기증 가족들
“장기기증은 내 아이가 다른 아이의 봄이 되는 길”
“유가족에게 죄송한 마음, 최선 다해 키우겠다”
뇌사 장기 기증자, 생존 시 장기기증자 모두 줄어
지난해 장기이식 대기자는 4만5567명 달해
장기기증에 대한 더욱 많은 관심 요구돼
“언젠가 기증인 부모님을 만나게 된다면, 건강하게 뛰고 있는 제 심장 소리를 꼭 들려드리고 싶어요.”(장기이식 수혜자 강윤호 군(8))
“제 아이의 심장이 누군가의 가슴에서 뛰고 있는 것만으로 감사합니다.” (장기이식 기증자 서정민 군 어머니 이나라 씨(32))
지난 1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에 위치한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에는 아이들의 왁자지껄한 웃음이 가득했다. 이날 이곳에서는 가정의 달을 맞아 장기를 이식받은 어린이들과 기증자 유가족(도너 패밀리)들이 함께하는 ‘생명나눔, 다시 만난 봄’ 행사가 열렸다.
어버이날을 앞두고 아이들은 ‘도너 패밀리’ 23명에게 직접 만든 카네이션을 달아줬다. 도너 패밀리들은 가슴팍에 달린 카네이션을 보고 아이들에게 “꽃길만 걸어”라는 말을 전하며 눈물을 훔쳤다. 어린이날을 맞아 도너패밀리도 아이들에게 손수 작성한 편지와 선물을 전달했다. 선물을 받은 아이들은 신나서 깡충깡충 뛰었다.
강호 도너패밀리 회장(69)은 “이곳에 있는 모두가 ‘생명’이라는 매개체를 마음에 간직하며, 고통과 슬픔을 넘어 사랑을 실천해 온 분들”이라며 “이 아름다운 만남이 서로에게 평생의 위로와 격려가 되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이나라 씨는 지난 2020년 생후 13개월 된 아들 서정민 군을 갑작스럽게 잃었다. 2019년 9월 16일에 태어난 정민 군은 이듬해 7월 심정지 상태로 병원에 이송됐고, 심폐소생술을 통해 가까스로 심장박동이 돌아왔지만 뇌사 추정 판단을 받았다.
이씨는 정민 군을 간호해 병원에 머무는 동안 병원 벽면에서 장기기증에 대한 포스터를 자주 봤다. 정민 군과 아름다운 이별을 준비하며 ‘정민이 앞에서 울지 않기, 책 읽어주기’ 등 버킷리스트를 적어 내려가던 중 마지막 칸에 ‘장기기증’을 적었다. 이씨는 “몇 번이고 번복하고 오랫동안 고민했지만, 장기기증을 하면 정민이의 일부가 이 세상에 남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라고 말했다. 정민 군은 2020년 9월 26일 심장, 폐, 간, 신장을 기증하며 세 명의 환자에게 새로운 생명을 선물했다.
장기매매 등의 부작용을 우려해 현행법상 장기 기증자·유가족과 수혜자는 서로의 신원을 알 수 없다. 이씨 역시 누가 정민 군의 장기를 기증받았는지 모른다. 다만 과거 정민 군의 장기기증 소식을 알리는 기사에 수혜자 가족으로 추정되는 분이 감사하다는 댓글을 단 것을 보고 잘 됐다고 안도하고 있다. 이씨는 “외국은 수혜자와 공여자를 알 수 있게 하는데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아 아이에게 옷 한 벌이라도 사주고 싶어도 그러지 못해 아쉽다”고 말했다. 이어 “장기기증은 정민이가 다른 아이들의 봄이 되는 길이었고, 그 선택을 단 한 번도 후회한 적 없다”며 “정민이에게 다음에 태어나도 엄마 아들로 태어나달라는 말을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강윤호 군(8)은 단심실이라는 선천성 심장질환을 안고 태어나 생후 직후부터 열 차례가 넘는 수술과 중환자실 입퇴원을 반복했다. 인공심장을 달고 8개월을 버틴 끝에 지난해 1월 31일 마침내 새 심장을 이식받을 수 있었다. 윤호 군의 아버지 강민구 씨(40)는 “여수에서 일을 하던 중 윤호가 장기기증을 받을 수도 있다는 전화를 받고 바로 기차표를 끊어 서울로 올라갔다”며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9살 윤호 또래의 아이가 하늘나라로 갔다고 생각하니 만감이 교차했다”고 말했다.
수술을 무사히 받은 윤호는 어느덧 퇴원한 지 1년이 다 돼 간다. 이식 전에는 입술, 손톱 등이 전부 파랬는데 이제는 얼굴에 생기가 돈다. 얼마 전에는 처음으로 가족 전체가 기아 타이거즈의 야구 경기도 관람하고 왔다. 아직 학교에 가지 못하는 윤호는 하루빨리 학교에 가 친구들을 만나고 싶다고 성화다.
강민구 씨는 지난달 장기기증 희망 등록에 참여했다. 강씨는 “병원에 있으면서 1년 6개월동안 심장이식을 못 받아 힘들어하던 아이를 봤다”며 “장기기증이 힘들고 숭고한 결정임을 알고 있지만, 장기기증이 누군가에게 새로운 삶을 살게 해줄 수 있음을 체감해 장기기증 희망을 등록했다”고 밝혔다. 이어 “자식을 떠나보낸 비통함과 슬픔을 안고 살아가실 유가족 분들이 떠올라 죄송한 마음”이라며 “윤호의 존재가 작은 위로가 될 수 있도록 앞으로 최선을 다해 키우겠다”고 전했다.
4일 매일경제가 김예지 국민의힘 의원실을 통해 국립장기조직혈액관리원으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뇌사 상태에서 장기를 기증한 사람은 397명이었다. 한 해 뇌사 장기 기증자가 400명을 밑돈 건 2011년(368명) 이후 13년 만이다. 지난해 생존 상태에서 장기를 이식한 사람은 1979명으로, 한 해 생존 시 장기기증자가 2000명을 밑돈 것도 2014년(1961명) 이후 10년 만이다.
지난해 장기기증 희망 등록자수는 7만563명으로, 2023년 8만3362명에 비해 줄었다. 그러나 장기이식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여전히 많아 지난해 총 장기이식 대기자는 4만5567명에 달하는 상황이다. 최근 젊은 층 사이에서 장기기증 타투 등 장기기증에 대한 문화가 유행하고 있지만, 전 연령대의 더욱 많은 관심이 요구된다는 분석이다.
김동엽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 상임이사는 “5월 가정의 달이 돌아오면 가족이 더욱 그리운 도너패밀리가 전국에 약 8000명 정도 있다”며 “기증해 주신 분들을 온 국민이 기억하고 감사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