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의 도발]이재명의 ‘신뢰 리스크’는 어찌 넘을 건가

2 days ago 7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날개를 달았다. 26일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 2심이 무죄로 뒤집히면서 조기 대선이 열릴 경우, 끈질기게 붙어있던 사법리스크를 떼고 가뿐히 대선 후보가 될 듯하다. 판결이 나온 뒤 그는 “사필귀정 아니겠냐”고 했고 민주당 박지원 의원(이하 직함 생략)은 “별의 순간이 왔다”고 최상급의 치사를 날렸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26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 항소심 선고 공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아낸 뒤 활짝 웃으며 차에 오르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26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 항소심 선고 공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아낸 뒤 활짝 웃으며 차에 오르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대통령 경호처는 “새로운 대한민국 위해서 하늘이 우리에게 보내주신 대통령…”이라고 개사곡을 부른 적이 있다. 2023년 12월 생일을 맞은 윤석열을 위해서다. 위기 때마다 법원이 수호신처럼 이재명을 살려낸 걸 보면 정말 그는 하늘이 보내주신 대통령(감)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어떤 ‘새로운 대한민국이냐’다.

● 거짓말 허가증 내준 2심 판결

“앞으로 대한민국은 민주당이 ‘중도 보수’를 맡아야 한다” 같은 이재명의 매끄러운 발언에서 단초를 찾는 건 불가능하다. 허언증(虛言症)처럼 태연하게 말을 뒤집는 고질적 태도 때문이다. 심지어 이번 공직선거법 항소심 재판부(재판장 최은정)는 정치인에게 거짓말 허가증까지 내준 셈이 됐다. 이재명이 “국토부 협박이 있었다”고 말한 데 대해 “상당한 압박감을 과장한 표현으로, 허위라고 보긴 어렵다”며 무죄 판결을 내렸으니 말이다.

그래픽 서장원 기자 yankeey@donga.com

그래픽 서장원 기자 yankeey@donga.com
말 몇 마디 때문에 사법부가 유력 대선 주자의 출마를 막는 것도 지나치다 싶긴 했다. 그러나 벌금형도 아닌 무죄로 사법적 날개를 달아준 것은 예상을 뛰어넘는다. 조기 대선 국면이 펼쳐질 경우 이재명이든 누구든 거짓말 대잔치를 벌여도 믿지도, 따지지도 말아야 하는지 재판부에 묻고 싶을 정도다.

“이재명은 안 된다”고 부르짖는 이들은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게 나을지 모른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나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속설처럼 이재명 발언에도 참말이 없지 않다는 사실이다. 듣는 이의 머리칼을 쭈뼛 솟게 만드는 마라 맛 말이지만 진심이란 그렇게 무심코 터져나오는 법이다.

● 이재명의 참말 “권력행사는 잔인하게”2016년 김어준의 유튜브에서 “저는 권력행사를 잔인하게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했던 고백이 대표적이다. 물론 “좋은 방향으로”라고 덧붙이긴 했다. 그러나 대선 패장이 빠르게 당권을 장악하고 ‘오너’로 올라선 과정을 돌이켜 보면, 참말이라 믿지 않을 수 없다.

이재명 자신의 2023년 9월 체포동의안 국회 가결을 놓고 검찰-비명(비이재명)계의 ‘내통’과 이후 총선까지를 설명한 3월 유튜브 발언 역시 많은 걸 시사한다. 만에 하나, 그가 최고 권력자가 될 경우 어떤 나라를 만들어갈지 짐작 가능해 더욱 섬뜩하다.

이재명 대표가 3월 초 유튜브 ‘매불쇼’에 출연해 자신의 체포동의안 가결 당시 검찰과 당내 일부 인사들이 ‘짜고 한 것’이라는 주장을 하는 모습. 자막은 유튜브가 음성을 인식해 자동으로 표출하는 자막으로, ‘자고’는 ‘짜고’의 오류다. 매불쇼 화면 캡처

이재명 대표가 3월 초 유튜브 ‘매불쇼’에 출연해 자신의 체포동의안 가결 당시 검찰과 당내 일부 인사들이 ‘짜고 한 것’이라는 주장을 하는 모습. 자막은 유튜브가 음성을 인식해 자동으로 표출하는 자막으로, ‘자고’는 ‘짜고’의 오류다. 매불쇼 화면 캡처
“검찰이 수사하는 과정에서 벌인 일…이런 걸 맞춰 보니까 이미 다 짜고 한 짓이거든요. 당내 일부하고”라는 ‘뇌피셜’은, 야당이 ‘반국가세력’이라는 윤석열의 비상계엄 이유만큼 편집적이다(만일 집권한다면 수사로 밝혀내주기 바란다). 일부러 “부결시켜 달라”고 해서 가결표 던진 의원이 드러나면 “당원과 국민들이 책임을 물을 거라고 본 것”이라는 설명은 중국 문화혁명 시절 마오쩌둥의 홍위병 동원을 연상케 한다.

● 홍위병 같은 문제인물 색출과 숙청

실제로 개딸(이른바 ‘개혁의 딸’) 등 강성 당원들은 ‘수박’ 색출에 돌입했다. 원외 강성 친명그룹이던 더민주전국혁신회의 사무총장 강위원은 표결 전부터 “끝까지 추적 색출해서 당원들이 그들의 정치적 생명을 끊을 것”이라고 했다(작년 총선 ‘자객 공천’ 등을 통해 민주당 최대계파로, 신주류로 급부상한 의원들이 더혁신회의 소속이다).

비명계 의원들이 수백 수천통의 욕설문자를 받은 것은 물론이다. 표결 뒤 겁에 질린 의원들이 ‘부결 인증샷’을 올려야 했다. 민주당 홈페이지 국민응답센터엔 ‘공개적으로 가결을 표명한 해당행위 5인 이상민, 김종민, 이원욱, 설훈, 조응천에 대한 징계를 청원합니다!’라는 글이 올라와 수만 명 동의를 받기도 했다(결국 이들은 당을 떠났다). “내가 그들을 구체적으로 제거하진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됐다”는 이재명의 말 그대로 남의 칼로 사람 잡은 차도살인(借刀殺人)이다.

이재명 대표의 체포동의안이 가결된 다음 날인 다음 날인 2023년 9월 22일  민주당 최고위원회의 자리에서 정청래 최고위원이 이재명 대표의 빈 자리와 ‘단식투쟁 23일차’라고 쓰여진 피켓을 바라보고 있다. 이날 정 최고위원은 체포동의안 국회 표결에서 찬성표를 행사한 소속 의원들을 겨냥해선 “가증스럽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당시 원내대표로 있던 비명계 박광온 의원은 가결 직후 원내대표직을 사임했다. 동아일보DB

이재명 대표의 체포동의안이 가결된 다음 날인 다음 날인 2023년 9월 22일 민주당 최고위원회의 자리에서 정청래 최고위원이 이재명 대표의 빈 자리와 ‘단식투쟁 23일차’라고 쓰여진 피켓을 바라보고 있다. 이날 정 최고위원은 체포동의안 국회 표결에서 찬성표를 행사한 소속 의원들을 겨냥해선 “가증스럽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당시 원내대표로 있던 비명계 박광온 의원은 가결 직후 원내대표직을 사임했다. 동아일보DB
체포동의안 가결에 책임진다며 비명 원내대표 박광온이 사퇴한 것도 황당하기 그지없다. 그해 봄 원내대표에 나서며 민주당의 진짜 위기는 ‘신뢰 리스크’라며 “목소리가 다르다는 이유로 배타적인 공격을 받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했는데 바로 그 이유로 배타적 공격을 받고 ‘하위 20%’로 찍혀 공천 탈락했다. 경기 수원정에서 내리 3선을 한 박광온 대신 그 자리에 꽂힌 사람은 ‘이재명에게 보내는 정조의 편지’ 같은 간질간질한 글을 바친 김준혁이었다.

● 이재명의 참말 “정치보복은 몰래 하지”

어디 박광온 뿐이랴. 대선 경선과 당 대표 선거 때 이재명과 맞섰던 박용진은 총선 공천에서 ‘의원 평가 하위 10%’라는 ‘시스템’에 의해 비명횡사 당했다. 역시 이재명은 순결하고도 고고하게 아무 짓도 안했던 것이다. 당원과 국민, 그리고 시스템에 의해 일극체제가 형성됐을 뿐.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해 2월 20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제413회국회(임시회) 2차 본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박 의원은 당시 경선 과정에서 의정활동 평가 현역 하위 10% 통보를 받았고 결국 경선에서 탈락해 같은 해 4월 치러진 제22대 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하지 못했다. 동아일보DB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해 2월 20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제413회국회(임시회) 2차 본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박 의원은 당시 경선 과정에서 의정활동 평가 현역 하위 10% 통보를 받았고 결국 경선에서 탈락해 같은 해 4월 치러진 제22대 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하지 못했다. 동아일보DB
같은 당 내에서 그토록 잔인하게 권력을 행사해온 그가 작년 11월 전 법제처장 이석연을 만나선 “국가공동체 통합을 가로막는 제일 큰 위험요소는 바로 정치보복”이라고 태연하게 말했다. 올 초 신년회견에서도 “정치 보복은 있어서도 안 되고, 해서도 안 되고, 그 단어조차 없어져야 한다”며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성공 이유도 보복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참으로 반지르르한 배암 같은 소리다. 이보다는 “세상에 어떤 대통령 후보가 정치 보복을 공언하느냐. 하고 싶어도 꼭 숨겨놓았다가 나중에 몰래 하지”(2022년 2월 27일)가 이재명의 참말이었다. 마오쩌둥은 애국주의로 무장한 분노청년들을 동원해 문제의 인물들을 처단하는 문화혁명(1964~1976)을 벌였다. 홍위병이 본때만 보이면 나머지 인민들은 알아서 자기검열을 하는 전체주의로 돌입한다. 그래서 모골이 송연한 것이다. 민주당 뿐 아니라 나라가 그리될 것 같아서.

● 개딸 동원한 일극체제, 전체주의 징조다

26일 오후 이재명 대표가 항소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자 서울 서초구 반포대로에 모여 있던 이 대표의 지지자들이 환호하고 있다. 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

26일 오후 이재명 대표가 항소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자 서울 서초구 반포대로에 모여 있던 이 대표의 지지자들이 환호하고 있다. 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
문혁은 가장 발달한 민주제 국가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고 송재윤 캐나다 맥마스터 대학 역사학 교수는 ‘슬픈 중국; 문화대반란’에 썼다. “광란 정치, 분쟁 정치, 조작 정치, 선동 정치, 폭민 정치, 집단 폭력, 다수독재의 산물이 문혁이다. 생각의 다양성, 가치의 다원성을 부정하는 좌, 우 정권은 모두 문혁에 빠졌다”고 했다.

중국 공산당은 권력분립을 부정하고 입법부와 행정부가 통일된 의행합일(議行合一)을 강조한다. 거대 야당 ‘이재명의 민주당’이 정권을 잡으면, 그대로 의행합일이 된다. 특정인이 권력을 독점하고 정부 내 견제와 균형을 허물 때 무너지는 것이 민주주의다. 프랑스혁명의 가장 비극적 측면이 발발 10년 뒤 새로운 프랑스가 과거의 프랑스와 흡사하다는 사실이었다.

전적으로 무(無)도덕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선하지 않고도 누구 못지않게 위대할 수 있다는 점에서 나폴레옹은 철저하게 현대적 인물이었다(제임스 웰스 ‘인간은 어리석은 판단을 멈추지 않는다’). 이재명에게 선함이나 위대함까지 기대하진 않는다. 다만, 권력자들은 자신이 구사하는 용어와 수사법의 신봉자이자 포로가 될 수 있음을 알았으면 한다. 그리하여 사법 리스크는 넘어섰으되 신뢰 리스크는 어찌 넘을지, 아니 안 넘어도 될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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