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민낯이 드러났다. 존재 이유가 철저한 선거 관리를 통해 국민 참정권 행사를 돕는 것이지만, 선관위는 지난 6·3 지방선거에서 유권자의 투표를 되레 방해했다. 투표용지부족으로 잠시라도 투표가 중단된 투표소는 서울 송파구 8곳을 포함해 26곳에 달했다. 일선 투표소에선 진작에 투표용지 부족 가능성을 보고했지만, 선관위는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헌법상 독립기관이라지만, 엄연히 공무원 조직인 선관위의 무능과 부실에 기가 막힌다. 국민 대다수는 직원 3000명을 거느린, 한 해 인건비로 세금 2400억원을 쓰는 행정기관의 2026년 현재 모습이라고는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고 한다.
선관위를 보면서 떠오른 책이 <나라를 위해서 일한다는 거짓말>이다. 노한동 전 문화체육관광부 서기관이 공직 사회에 만연한 무기력과 가짜 노동, 쓸데없는 규칙, 책임 회피 등을 파헤쳐 화제가 됐다. 저자는 문체부에서 10년간 일하다가 2023년 서기관으로 승진하자마자 사표를 던지고 이 책을 냈다.
“시간이 지나면 조직 논리에 길든다.… 실상은 아무런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도 그저 버티기만 하면 정해진 승진이 따라온다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이다.” 노 전 서기관은 ‘공무원들이 나라를 위해서 일한다고 하지만, 정말 나라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는지’를 이렇게 물었다. ‘무사안일’로밖에 설명되지 않는 선관위 문제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더 큰 걱정은 선관위 같은 무체계와 무능이 드러나지 않았을 뿐 정부 조직 다른 곳에도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노동 분야를 비롯한 각종 규제 합리화와 연금·재정 개혁 등의 얽히고설킨 문제 앞에서 아예 움직이지 않고 ‘복지부동’하거나 일하는 시늉만 하는 악습을 수없이 봐온 터다. 선관위처럼 분명하게 드러난 상처는 외과적 수술로 치료할 수 있지만, 오래돼 관성으로 굳어 버린 고질병은 더욱더 고치기 힘들고 폐해도 큰 법이다.
지난 4월 열린 규제합리화위원회 1차 전체 회의에서 이재명 대통령 역시 비슷한 문제의식을 드러냈다. “대한민국 공직사회가 사실은 매우 억압적인 문화 속에서 문제 되는 일은 하지 말자고 하는데 정말 심각한 문제”라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공무원이 어떤 마인드로 일하느냐는 그 나라의 운명을 결정할 정도로 중요하다”고 했다.
<나라를 위해서 일한다는 거짓말>은 더 신랄하게 지적한다. “세상엔 한 장짜리 보고서로 모두 담을 수 없는 문제가 가득하다.…그렇지만 정부 보고서는 ‘핵심만 간단하게’라는 원칙에 경도된다.…현실을 의도적으로 평탄화하는 것이다.” 두 얼굴을 가진 관료 얘기도 있다. “평소에는 공익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법과 제도가 준 권한과 직위로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다는 ‘갑’의 얼굴을 한다. 그러나 진짜 일해야 하는 때가 오면 정권, 국회, 여론의 뒤에 숨어 아무런 판단도 하지 않는 ‘을’의 얼굴을 한다.”
정치 외풍이 관료 사회를 주눅 들게 한 지 오래다. 이해관계가 복잡한 현안일수록 성과 내는 정책을 만들려면 전체를 읽는 전문성이 필요하지만, 현실은 반대로 가고 있다. 줄서기를 강요하는 진영 정치 탓에 현안에서 한발짝 물러서려는 공무원이 적지 않다. 금융당국이 뒤늦게 도입을 후회한다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단일종목 레버리지 ETF나 줄줄이 나온 정부 대책에도 서울과 수도권 집값이 오르는 것도 국민이 볼 때는 정상이 아니다. 많은 부작용을 부르고 있는 최저임금 고속 인상이나 하청 노조 교섭권을 크게 확대한 노란봉투법도 마찬가지다. 정부 안에 수많은 전문가가 있는데도 이런 정책 결과를 예상하지 못했다면 무능한 것이고, 알고도 눈감은 것이라면 무책임한 것이다.
‘진짜 일해야 할 때 아무 판단도 하지 않거나 문제 되는 일은 전혀 하지 않는’ 정부 조직과 공무원이라면 실상 선관위 와 다를 바 없다. 청와대는 얼마 전 민간 우수 인재의 공직사회 유입에 초점을 맞춘 공직사회 활력 제고 방안을 발표했다. 그렇지만 더 중요한 것은 전문성을 바탕으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하고, 그 목소리를 정책에 반영하는 시스템을 마련하는 일이다. 적극 행정이 사라진 공직 사회를 위해 세금을 낼 국민은 많지 않다. 대통령 말처럼 공무원이 어떤 마인드로 일하느냐는 그 나라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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