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자동차그룹이 지난달 210억달러(약 31조원)에 이르는 미국 투자계획을 발표했을 때 시장 일각에선 “너무 섣부른 결정 아니냐”는 반응이 나왔다. ‘관세 폭탄’을 앞세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압박에 못 이겨 불요불급한 투자를 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에서다. 루이지애나 제철소 가동 시점이 2029년인 만큼 트럼프 대통령 재임 기간에는 현대차그룹이 미국 현지 생산에 따른 관세 혜택을 전혀 못 받고, 정작 제철소 가동 시점에 미국이 다시 무관세 정책으로 돌아서면 현지 생산의 이점이 반감된다는 의미였다.
이에 대한 산업계의 해석은 다르다. 현대차그룹이 단순한 관세 대응이 아니라 현지 생산의 필요성이 그만큼 크다고 판단해 미국에 대규모 투자를 결정했다는 얘기다. 관세와 보조금은 기업이 투자 타이밍을 고르는 하나의 ‘계기’였을 뿐, 투자를 결정한 더 중요한 이유는 세계 최대 소비시장인 미국을 보다 효율적으로 공략하기 위한 ‘초석 다지기’란 설명이다.
실제 현대차그룹은 트럼프 2기 정부 출범 전부터 미국 투자 확대를 검토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차·기아가 세계 최대 자동차 시장인 중국에서 2016년부터 판매량이 꺾인 뒤 미국이 핵심 시장으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현대차·기아는 지난해 전 세계에서 703만3000대를 판매했는데 이 중 24.3%(170만8293대)가 미국에서 팔렸다.
현대차그룹이 루이지애나 제철소 건립 계획을 떠올린 것도 현대차와 기아의 미국 점유율 확대 필요성에서 비롯됐다. 미국에서 생산한 강판으로 곧바로 자동차를 만들면 물류비 등을 절감할 수 있는데다 브랜드 선호도가 높아져 자동차 판매에도 도움이 된다고 본 것이다. 현지에 공장을 지으면 환율과 정책 리스크를 줄일 수 있고, 시장 상황에 기민하게 대처할 수도 있는 부수효과도 거둘 수 있다.
LG에너지솔루션, SK온 등 배터리 업체들이 앞다퉈 미국에 생산기지를 구축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보조금과 관세도 영향을 미쳤지만, 기본적으로 미국에 생산거점을 둔 자동차 업체에 납품하려면 현지에 생산기지를 둬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신정은 기자 newyeari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