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회계기본법, 직역의 이해 넘어 신뢰의 질서 세울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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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회계기본법, 직역의 이해 넘어 신뢰의 질서 세울 때

회계는 단순한 장부 정리가 아니다. 공동체의 신뢰를 측정하고, 책임의 경계를 분명히 하는 사회의 언어다.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번영 뒤에는 복식부기라는 신뢰의 질서가 있었고, 프랑스 왕실의 몰락 과정에서는 불투명한 재정 운영과 책임의 실종이 드러났다.

우리 현대사도 예외가 아니다. 1997년 외환위기의 이면에는 분식회계라는 ‘가짜 신뢰’가 있었다. 그 피해는 자본시장에만 그치지 않았다. 왜곡된 정보는 자본의 잘못된 배분을 낳았고, 그 부담은 고스란히 국민경제와 사회 전반에 전가됐다. 회계가 흔들리면 시장 질서가 무너지고, 공동체 신뢰도 함께 흔들린다는 사실을 우리는 뼈아프게 경험했다.

이 교훈은 오늘날의 코리아 디스카운트와도 맞닿아 있다. 국내 기업의 만성적 저평가 뒤에는 회계 정보의 신뢰성에 대한 시장의 의구심이 자리한다. 시장은 수치의 크기만 보지 않는다. 그 수치를 얼마나 믿을 수 있는지, 책임 체계가 얼마나 분명한지를 함께 본다. 회계 투명성 제고는 단지 규범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기업의 실질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고 국가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과제다.

이 원칙은 기업을 넘어 더 넓게 적용돼야 한다. 주주의 돈이든, 조합비든, 기부금이든, 세금이든 남이 맡긴 자금을 다루는 곳에는 설명 책임이 따라야 한다. 대기업과 상장사는 물론 노동조합, 비영리단체, 공공기관에 이르기까지 타인의 자금과 공적 성격의 자원을 다루는 모든 조직이 예외 없이 투명한 회계 언어로 소통해야 한다. 이것이 공정한 사회의 최소 조건이다.

문제는 현행 제도가 이 원칙을 일관되게 뒷받침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외부감사법과 공인회계사법 등 개별 법령은 각자의 목적에 맞게 작동하고 있지만, 회계의 기본 원칙과 책임 체계를 통합적으로 세우는 상위 법적 토대는 여전히 없다. 그래서 회계기본법이 필요하다. 회계기본법은 새로운 규제를 덧붙이는 법이 아니라, 모든 경제 주체에 적용될 투명성의 보편적 기준을 명문화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 논의가 특정 직역의 권한 배분 문제로 축소돼서는 안 된다. 어느 한 직역의 이해를 대변하는 게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의 신뢰 질서를 세우는 법이어야 한다. 물론 직역 간 역할 논의가 필요할 수 있다. 그러나 더 본질적인 질문은 누가 더 많은 권한을 갖느냐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어떤 회계 원칙과 책임 기준 위에서 작동해야 하는지에 있다.

소액투자자는 경영진보다 약하고, 조합원은 집행부보다 약하며, 기부자는 단체 운영진보다 약하다. 불투명성의 이익은 대개 더 많은 정보를 가진 쪽에 돌아가고, 그 비용은 평범한 구성원에게 전가된다. 투명한 회계는 정보 비대칭 앞에서 힘없는 사람을 지키는 가장 현실적인 방어선이다.

소액투자자가 경영진을 믿고, 조합원이 집행부를 믿으며, 기부자가 단체 운영진을 믿는 사회. 그것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선진 대한민국의 모습이다. 불투명한 회계로 인한 사회적 비용은 지금 이 순간에도 누적되고 있다. 지속 가능한 성장은 투명한 회계라는 튼튼한 기초 위에서만 가능하다. 신뢰의 인프라를 세우는 회계기본법 논의를 더 이상 미뤄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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