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K-거버넌스가 글로벌 모범이 되려면

1 week ago 7

[기고] K-거버넌스가 글로벌 모범이 되려면

거버넌스에는 정답이 없다. 국가마다, 제도마다, 역사와 문화마다, 업종과 소유구조마다 작동하는 방식이 다르다. 엔론과 리먼브라더스는 형식상 다수의 외부이사를 두고 감사위원회를 갖춘 영미식 이사회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독립성은 제도 위에 있었을 뿐, 경영진을 견제하지 못했다.

에르메스는 창업 가문이 6세대째 경영권을 쥐고 있다. 머크는 350년 넘게 13대에 걸쳐 가족이 이어왔다. 싱가포르 테마섹은 국가가 100% 소유하지만 민간 전문가 중심 이사회를 갖춘 상업적 투자회사로 운영된다. 형태는 전혀 다르지만 이 기업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오래 지속해왔다. 거버넌스의 본질은 특정 모델의 이식이 아니라, 주어진 여건 안에서 끊임없이 최적해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지금 글로벌 거버넌스 담론은 형식의 과잉과 실질의 부재라는 역설에 빠져 있다. ESG가 그 간극을 메울 것 같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소송과 규제 리스크가 빠르게 늘고 있고, 기관투자자들 사이에서도 기업의 약속과 실제 행동 사이의 괴리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지표를 달성하는 방법만 정교해졌을 뿐, 이해관계자와의 실질적 신뢰는 뒤따르지 않았다. ESG 이후를 채울 새로운 담론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 실마리는 멀리 있지 않다. 버지니아대 에드워드 프리먼(Edward Freeman) 교수의 이해관계자 이론은 코로나19 팬데믹과 ESG 논의를 계기로 그 중요성이 한층 부각되고 있다. 주주뿐 아니라 고객, 직원, 협력사, 지역사회를 포괄하는 다중 이해관계자 거버넌스가 이론을 넘어 기업 의사결정의 새로운 기준으로 부상하고 있다.

북유럽이 이 방향에서 주목할 만한 사례를 제공한다. 스웨덴·덴마크·노르웨이의 주요 상장사들은 지배주주가 집중적인 의결권을 유지하면서도 이사회 독립성을 높이고, CEO와 의장 겸직을 금지하는 구조를 갖추고 있다. 오너의 장기 관점과 이사회의 견제가 결합된 이 구조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북유럽 기업들이 빠르게 안정을 회복한 배경으로 자주 분석된다. 통제는 유지하되, 그 통제가 이해관계자의 신뢰와 결합하도록 구조를 설계한 것이다.

한국 기업은 이미 이 방향의 실천 자산을 갖고 있다. EU가 공급망 인권·환경 실사를 법적 의무로 규정하는 지침을 2020년대에 들어서야 도입할 때, 한국의 동반성장 평가 체계는 이미 10년 넘게 운영 중이었다. 장기 협력사 관계, 업황 급락 속에서도 유지한 기술 투자, 위기 시 협력사 대금 선지급 같은 관행은 법이 요구해서가 아니라 이해관계자와의 신뢰가 장기 경쟁력이라는 경영 철학에서 나온 것이다. 문제는 이것을 스스로 K-거버넌스로 정의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것이 지금 K-거버넌스 최적화가 필요한 이유다.

K-거버넌스 최적화는 하나의 표준 모델이 아니다. 각 기업의 대내외 여건, 이해관계자 구성, 소유구조, 비즈니스 특성에 맞춰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거버넌스를 설계하고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과정이다. 투자자, 고객사, 협력사, 임직원, 지역사회, 일반국민 등 모든 이해관계자를 위한 최대 공약수를 찾는 것, 그것이 K-거버넌스의 핵심이자 글로벌 모델로서의 강점이다.

거버넌스의 정답은 없다. 최적화만이 있을 뿐이다. 그 최적화를 가장 진지하게, 가장 한국적인 방식으로 실천하는 기업들이 모일 때, K-거버넌스는 방어해야 할 무언가가 아니라 세계에 먼저 제안할 수 있는 모범이 된다. 그것이 번영하는 대한민국(Thriving Korea)으로 가는 길이다.

< 최승호 와이즈파트너즈 대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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