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자신의 역설, 전쟁 이후 떨어진 금값
중동 전쟁 발발로 국제 유가 상승… 물가 상승 자극해 금리 인상 우려
달러 강세도 금 투자 매력 낮출 듯… 작년 한 해, 가격 67% 오른 탓에
차익 실현 매물 쏟아지는 영향도, 시장에선 가격 전망 대개 낙관적
JP모건 “온스당 6300달러 갈 것”… “과열장 끝났다” 신중론도 나와
‘전쟁이 나면 금을 사야 한다.’대표적인 안전 자산으로 꼽히는 금은 전쟁이 터질 때면 이같이 생각하는 수요가 많아져 값이 올랐다. 금은 화폐와 달리 발행 주체가 없기 때문에 전쟁으로 국가가 붕괴해도 가치를 잃지 않기 때문이다. 전쟁이 터지거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무역 전쟁을 벌일 때면 금값은 대부분 상승했다.
하지만 이번 중동 전쟁은 양상이 다르다. 2월 28일(현지 시간) 미국과 이란의 전쟁이 시작된 뒤 투자 시장의 상식이 뒤집히는 모양새다. 금은 매일 발생하는 이슈에 따라 오르락내리락하지만 이번 전쟁 발발 이후엔 대체로 주춤하는 분위기다. 시장이 복잡한 변수들 속에 금 투자를 망설이는 것으로 보인다.
전쟁 이후 국제 유가가 크게 오르자, 주요국의 기준금리 인상 압력이 커져 금 수요가 시들해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지난해 금값이 워낙 많이 올라 차익 실현을 하려는 수요가 적지 않다는 시각도 있다.● 유가 상승에 금리 인상 압력, 금 매력 떨어뜨려

전쟁이 터지며 하락하기 시작한 금값은 3월 26일 온스당 4392.3달러(약 655만 원)로 고점 대비 18% 하락했다. 이달 14일(현지 시간) 종가 기준 금값은 온스당 4690달러 안팎으로 5000달러 선을 다시 넘어서지 못했다.
금값이 내리는 가장 큰 이유는 국제 유가 상승에 있다. 중동 전쟁으로 세계 원유 운송량의 20%가 지나가는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되자 국제 유가는 가파르게 올랐다. 전쟁 전 배럴당 70달러 선에서 움직였던 북해산 브렌트유 선물 가격은 전쟁 발발 2개월 만인 4월 29일 종가 기준으로 110달러를 넘어섰다. 전쟁 전 배럴당 65달러였던 서부텍사스산원유(WTI) 역시 같은 기간 106달러까지 올랐다. 국제 유가 상승은 물가를 자극한다. 물가가 오르면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를 비롯한 주요국 중앙은행이 기준금리를 올릴 가능성이 크다. 전쟁이 길어져 고유가가 오래 지속되면 물가 안정을 위해 고금리가 예상보다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다. 기준금리가 높아지면 은행에서 받을 수 있는 이자 수익이 커져 상대적으로 금이 투자처로서의 매력을 잃는다.홍성기 LS증권 연구원은 금값이 주춤한 원인에 대해 “금이 안전자산의 지위를 상실했다고 평가하는 이들이 있다”며 “사실 이번 중동 전쟁 때 미국 실질금리가 과거 우크라이나 전쟁 초기와 달리 상승한 점이 금값 하락의 배경”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여기에 미 연준이 금리를 인하할 것이라는 기대까지 사라져 금 가격에 하방 압력 요인이 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전쟁이 발발하면 금값이 오른다는 과거 공식이 통하지 않고, 긴축 우려가 투자 심리에 영향을 미쳐 금 투자 수요가 줄었다는 설명이다.
이런 현상은 처음이 아니다. 2022년 2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당시 금값은 개전 초기 급등했다가 이후 내림세를 보였다. 전쟁 시작 초기인 3월 8일 온스당 2043달러에 거래됐다가 줄곧 내림세를 이어가며 1600달러 선까지 떨어지기도 했다.
그때도 금리가 영향을 줬다. 전쟁이 이어지며 세계적으로 물가가 오르자 미 연준은 한 번에 기준금리를 0.75%포인트 올리는 ‘자이언트 스텝’에 나섰다. 미 연준은 2022년에 4차례 연속 자이언트 스텝에 나서며 기준금리를 연 3.75∼4.0%까지 끌어올렸다. 여기에 달러화 강세까지 벌어지며 금 투자 수요는 더욱 위축됐다. 금 대신 다른 안전 자산인 미국 국채 등 달러화 자산으로 돈이 몰린 것이다.
금과 달러화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국제 투자시장에서 금은 달러로 거래된다. 달러화 가치가 오르면 그만큼 다른 통화로 금을 사려는 사람들은 금값이 비싸다고 느낀다. 달러 가치가 높아질수록 금 가격이 오르는 듯이 보여 매수를 망설이게 된다는 것이다. 전규연 하나증권 연구원은 “달러 강세 환경이 금의 상대적인 매력도를 더욱 낮췄다”고 분석했다.● “금 팔아 현금 만들자” 차익 실현 심리도 영향
전쟁 발발 이후 금을 현금화해 유동성을 확보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난 것도 가격 하락에 영향을 줬다. 일반적으로 전쟁 초기에는 주식, 가상자산 등 상대적으로 위험성이 높은 자산 가치가 크게 떨어지는 경향을 보인다. 대출을 일으켜 대규모 투자를 하는 기관투자가 등은 이 시기에 주가지수 폭락으로 막대한 손실을 볼 때가 많다. 증거금을 채워 넣어야 하는 ‘마진콜’(추가 증거금 요구) 상황에 직면하기도 한다. 이럴 때는 현금을 충분히 확보해야 한다. 금을 쥐고 있는 대신 현금 실탄을 쟁여 두려는 심리가 커지는 이유다.
금값은 중앙은행의 금 거래에 영향을 받기도 한다. 각 국가는 자국의 화폐 가치가 하락하는 것을 방어하기 위해 바로 현금화할 수 있는 금을 매각하거나, 금을 담보로 외환을 빌려오는 스와프 거래를 통해 시중에 유동성을 공급하기도 한다. 실제로 튀르키예 중앙은행은 중동 전쟁 영향으로 자국 통화인 리라화의 가치가 폭락하자 환율 방어를 위해 올해 3월 한 달 동안 약 60∼70t에 달하는 금을 시장에 내놓았다. 세계 최대 금 매입 국가 중 하나였던 튀르키예가 전쟁 발발 직후 시장에 금을 대규모로 내놓으면서 가격이 내려갔다.
금 가격이 지난해부터 올해 초까지 지나치게 빠르게 오른 가운데, 전쟁 발발 이후 차익 실현 매물이 쏟아진 점도 영향을 줬다. 전쟁이라는 대형 사건이 발생하자 뉴스에 파는 ‘셀온(sell-on) 현상’으로 차익 실현 매물이 쏟아지며 조정 국면에 진입했다. 골드만삭스는 이를 두고 ‘전술적 후퇴’라고 평가했다. 특히 주요국 중앙은행의 금 매수세가 주춤해진 틈을 타 헤지펀드 등 기관투자가가 차익 실현 매물을 쏟아내면서 가격이 떨어졌다는 분석이다. 전 연구원은 “장기간 금 가격 상승 랠리가 펼쳐지자, 자금이 급격하게 유입되며 과열 장세가 나타났지만, 금값이 하락하자 자금이 유출되며 가격 조정을 초래했다”고 설명했다.● 주요 투자은행 “연말 금 목표 가격 6300달러”

주요국 중앙은행의 금 투자 선호 성향이 강해 가격이 앞으로 더 하락하진 않을 것이라는 심리도 있다. 세계금협회(WGC)에 따르면 올해 1분기(1∼3월) 전 세계 중앙은행과 공공기관은 금을 244t 순매입했다. 이는 전 분기 대비 17% 증가한 규모다. 3월 이후 금값의 변동성 확대에도 중국 중앙은행인 런민은행은 18개월 연속 금 보유 규모를 확대했다.
주요 투자은행들은 금값이 강세를 이어갈 것이라는 전망을 유지하고 있다. 골드만삭스는 올해 말 기준 금 목표 가격을 온스당 5400달러로 제시했다. JP모건은 6300달러까지 오른다고 봤고, UBS는 6200달러를 상단 목표로 제시했다.
황병진 NH투자증권 FICC리서치부장은 “중동 긴장이 완화하며 국제 유가가 떨어질 때가 상대적으로 금을 저가에 매수할 수 있는 기회일 것”이라며 “무엇보다 금 가격 상승을 중장기적으로 견인하는 세계 주요국 중앙은행들의 실물 매입세도 여전하다”고 조언했다.
최미송 기자 cm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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