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도, 글도 뛰어났던 명동 멋쟁이…“내가 자식을 몰라본다고?” [나를 그린 화가들]

3 weeks ago 9

문화

그림도, 글도 뛰어났던 명동 멋쟁이…“내가 자식을 몰라본다고?” [나를 그린 화가들]

뉴스 요약쏙

AI 요약은 본문의 핵심만 제공하므로,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사 본문 전체를 확인하는 것이 좋습니다.

1950년대 서울 명동의 카페는 천경자를 비롯한 많은 예술가들이 모여들었던 장소로, 그는 화가이자 수필가로서 독특한 존재감을 발휘했습니다.

천경자는 자신의 예술적 고뇌와 개인적 어려움을 그림으로 승화시켰고, 특히 그의 작품 ‘미인도’는 위작 논란을 불러일으키며 그를 사회적 이슈의 중심에 놓이게 했습니다.

그의 유산은 한국 동양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으며, 이제 그의 억울함을 풀기 위한 유족의 법적 노력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회원용

핵심 요약쏙은 회원용 콘텐츠입니다.

매일경제 최신 뉴스를 요약해서 빠르게 읽을 수 있습니다.

천경자, ‘장미와 여인’, 1981

천경자, ‘장미와 여인’, 1981

1950년대 서울 명동의 카페는 예술가들의 아지트였습니다. 김환기, 이중섭, 박서보와 같은 화가들이 드나들었고 박인환, 김광균, 조지훈, 김수영 등 시인들도 이곳을 찾았습니다. 당시의 명동 다방을 논할 때 빠지면 서운한 예술가가 한 명 있습니다. 바로 화가이자 작가로 10권이 넘는 수필집을 낸 천경자입니다.

천경자는 원색의 체크무늬 코트를 입고 명동을 활보하던 멋쟁이였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명동 ‘인싸’였던 셈입니다. 그는 화가뿐만 아니라 문인들과도 우정을 나눴습니다. ‘토지’의 소설가 박경리와 특히 친하게 지냈죠. ‘광장’을 쓴 최인호는 그의 재능을 부러워하기도 했습니다.

인기 수필가였지만 천경자는 근본적으로 화단의 슈퍼스타였습니다. 전문가 집단에게 인정받았을 뿐만 아니라 대중성도 겸비했습니다. 천경자의 개인전에는 많은 인파가 몰렸고, 관객들은 그에게 싸인을 받기 위해 긴 줄을 서야 했죠.

이 기사가 마음에 들었다면, 좋아요를 눌러주세요.

좋아요 1

Read Entire Artic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