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부인의 홈웨어, 침실을 넘어 거리로 나오다

4 hours ago 3

[패션 NOW]
실크-새틴 활용한 ‘부두아 룩’
슬립 드레스에 프린지, 리본 달고
브라 톱에 재킷 레이어링해 눈길… 과한 노출 없이 관능적 분위기 연출

슬립 드레스, 브라 톱, 슬립 스커트와 파자마 팬츠 등 실내복으로 쓰이던 옷들이 외출복으로 변신했다. 편안하면서도 화려하고 관능적인 효과를 줄 수 있는 ‘부두아 룩’이 올여름 패션 코드로 주목받고 있다. 왼쪽부터 디 아티코의 슬립 드레스, 돌체앤가바나의 레이스 브라 톱 연출, 크리스찬 디올의 셔링 장식 슬립 스커트. 각 브랜드 제공

슬립 드레스, 브라 톱, 슬립 스커트와 파자마 팬츠 등 실내복으로 쓰이던 옷들이 외출복으로 변신했다. 편안하면서도 화려하고 관능적인 효과를 줄 수 있는 ‘부두아 룩’이 올여름 패션 코드로 주목받고 있다. 왼쪽부터 디 아티코의 슬립 드레스, 돌체앤가바나의 레이스 브라 톱 연출, 크리스찬 디올의 셔링 장식 슬립 스커트. 각 브랜드 제공
가장 사적이고 친밀한 공간에 머물러야 할 속옷이 아무렇지 않게 거리 한복판으로 나온다. 속옷과 일상복의 경계가 흐려지는 패션계의 흐름은 최근 몇 시즌 동안 꾸준히 반복되어 왔다. 트렌드가 아무리 빠르게 바뀌어도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1990년대에 대한 향수 때문일까. 아니면 불안과 과잉이 일상이 된 시대에 몸과 마음을 조금 더 가볍게 두고 싶은 마음 때문일까. 그 시절을 상징하는 슈퍼모델 케이트 모스의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슬립 드레스처럼 감춰야 한다고 여기는 것들을 태연하게 드러내는 태도에는 자유롭고도 반항적인 매력이 있다.

올해에는 단순히 슬립 드레스 몇 벌을 꺼내는 데 그치지 않는다. 프랑스 파리의 부두아에서 영감을 받은 우아한 란제리 감성의 아이템들이 일상복 안에 자연스럽게 스며들며 외출복의 영역을 넓히는 중이다. 부두아(Boudoir)는 프랑스어로 귀족 여성의 침실 혹은 드레스룸을 뜻한다. 섬세한 레이스 캐미솔과 시스루 슬립, 은은하게 빛나는 새틴 팬츠와 스커트로 채워진 2026년식 부두아 룩은 유혹적이되 노골적이지 않고, 편안하지만 흐트러져 보이지 않는 균형감을 지닌다.

란제리를 단순히 도발적인 옷으로만 바라볼 필요는 없다. 핵심은 얼마나 영민한 레이어링으로 이 사적인 영역의 옷들을 설득력 있게 현실의 옷차림으로 끌어오느냐에 있다. 침대에서 막 일어난 듯한 분위기가 과하게 느껴진다면 격식을 갖춘 블레이저와 로퍼 한 켤레를 더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번 시즌 트렌드를 이끈 주역은 여전히 슬립 드레스다. 한때 1990년대 미니멀리즘을 대표하던 슬립 드레스가 레이스는 물론 리본과 프린지 같은 장식을 입고 훨씬 다채로운 모습으로 변주됐다. 대표적으로 페라가모는 새틴 조각을 이어 붙인 유려한 슬립 드레스로 관능적인 매력을 보여 줬다. 여기에 레이스 트리밍과 리본 스트랩 장식을 더해 란제리를 하이엔드 드레스의 영역으로 끌어올렸다. 카르벤은 보다 현실적인 해법을 제시했다. 차분한 그레이 톤의 블라우스에 같은 소재와 컬러의 슬립 드레스를 느슨하게 겹쳐 부두아 룩을 한층 일상적인 옷차림에 가깝게 풀어냈다. 생로랑은 정반대의 방식으로 트렌드에 힘을 실었다. 스커트 헴라인을 강조한 고전적인 슬립 드레스에 터프한 가죽 재킷을 매치해 강한 카리스마를 드러냈다. 디 아티코는 찰랑이는 금빛 프린지 장식을 입힌 슬립 드레스로 이번 컬렉션을 통틀어 가장 강한 인상을 남겼다.

슬립 드레스와 함께 속옷과 라운지웨어의 경계를 넘나드는 또 하나의 아이템은 브라 톱이다. 셔츠나 재킷 안에 살짝 넣어 입음으로써 평범한 룩에 단숨에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특히 이번 시즌에는 슈트와의 궁합이 두드러졌다. 돌체앤가바나는 레이스 브라 톱과 파자마 셔츠에 핀 스트라이프 슈트를 매치하는 고혹적이면서도 날 선 테일러링을 보였다. 브라 톱의 노출이 부담스럽다면 캐미솔을 활용하는 것도 방법이다. 부드러운 실크 캐미솔에 투박한 빈티지 데님 진을 매치한 스텔라 매카트니가 좋은 예다.

가벼운 슬립 스커트들도 속속 등장했다. 슬립 스커트의 가장 큰 장점은 다재다능한 활용도에 있다. 샤넬처럼 하늘하늘한 시스루 블라우스와 매치하면 로맨틱한 분위기를, 프라다처럼 티셔츠와 셔츠 위에 가볍게 레이어드하면 한층 캐주얼한 감각을 살릴 수 있다. 크리스찬 디올은 깊이 파인 네크라인의 니트에 풍성한 셔링 장식의 슬립 스커트를 매치해 담백하면서도 시크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스커트 못지않게 눈에 띈 아이템은 파자마 팬츠다. 마치 파리의 침실에서 막 걸어나온 듯한 실크 팬츠가 런웨이 곳곳에서 줄줄이 포착됐다. 스키아파렐리는 관능적인 시스루 소재의 재킷과 파자마 셋업을 선보이며 노골적인 노출이나 화려한 장식 없이도 충분히 감각적인 부두아 룩을 완성했다. 발망은 하렘 스타일의 실크 팬츠에 프린지 백과 플립플롭을 더해 침실과 휴양지 사이를 오가는 듯한 느슨한 부두아룩을 제안했다.

이렇듯 한때는 아슬아슬하게 여겨졌던 속옷이 홈웨어라는 부담을 덜고 현대적인 옷차림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디자이너들은 몇 시즌에 걸쳐 순수함과 도발, 편안함과 긴장감이 자연스럽게 공존하는 부두아 미학을 완성했다. 타인을 만족시키기 위한 노출이 아니라 자신의 취향과 개성을 드러내는 자기 주도적인 표현으로 부두아 룩이 주목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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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미은 패션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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