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박민우]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소니의 ‘아이팟 모먼트’

2 days ago 5

박민우 산업1부 차장

박민우 산업1부 차장
스마트폰이 없던 고등학교 학창 시절 가방 속에 늘 CD플레이어를 가지고 다녔다. 그때만 해도 소니 워크맨이 풍미하던 시절이었다. 영화 ‘건축학개론’에서 96학번 대학 새내기로 나왔던 배우 수지의 CD플레이어가 소니 D-E777. 당시 내가 썼던 모델은 2001년 나온 소니 D-EJ1000이었는데 그땐 몰랐다. 그해 처음 출시된 애플의 아이팟(MP3플레이어)이 소니의 운명을 어떻게 바꿀지.

한때 일본의 전자업계 그 자체로 불렸던 소니는 자만에 빠진 채 빠르게 변하는 디지털 흐름을 따라가지 못했다. 그 결과 2003년 4월 25일과 28일 2거래일 동안 주가가 27%가량 폭락하는 ‘소니 쇼크’를 맞았다. 반면 애플은 2007년 ‘아이폰’까지 출시하면서 모바일 시대를 활짝 열었다. 소니는 애플의 하청업체로 전락했다는 평가를 받았고, 2009년부터 2014년까지 5년 연속 적자를 면치 못했다.

‘아이팟 모먼트’ 이후 소니가 부활하기까지 딱 20년이 걸렸다. 다시 태어난 소니는 더 이상 워크맨과 바이오(VAIO) PC, 트리니트론 TV 등 하드웨어를 팔던 가전업체가 아니었다. 게임과 애니메이션 등 콘텐츠 관련 소프트웨어 매출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엔터테인먼트 기업으로 환골탈태했다. 최근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정보기술(IT)·가전 전시회 ‘CES 2025’에서 소니는 일본 2위 완성차 업체 혼다와 만든 합작사 소니혼다모빌리티를 통해 인공지능(AI) 기반 자율주행 기능을 갖춘 전기차 ‘아필라1’를 공개하기도 했다.

소니뿐만이 아니다. 십수년간 와신상담한 일본 기업들이 변하고 있다. 이번 CES에서 종합가전기업 파나소닉은 AI 기반 사업 비중을 2035년까지 30%로 확대하겠다고 선언했다. 카메라 기업 니콘은 렌즈를 통해 사물을 인식하고 식기를 세척하는 주방 로봇을 만들고, 섭씨 영하 180도의 극한 기온에 견딜 수 있는 달 탐사용 카메라를 공개했다.

일본 도요타그룹도 눈앞의 수익성보다 AI의 확장성에 베팅하고 있다. 이번 CES에서 AI 기반의 첨단 실험 도시인 ‘우븐시티(Woven City·그물망 도시)’의 1단계 준공 소식을 알린 도요다 아키오 도요타그룹 회장은 “돈을 못 벌어도 괜찮다”며 인류에게 새로운 기술과 아이디어를 실험할 ‘테스트베드’를 제공하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21세기 초반 아이팟과 아이폰 모먼트에 처참하게 실기했던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 있는 탓일까. 2022년 ‘챗GPT 모먼트’ 이후 일본 산업계의 대응은 어느 나라보다 더 절실해 보인다. 특히 지난해 12월 미국 플로리다주 마러라고 리조트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과 기자회견을 열고 1000억 달러(약 146조 원) 규모의 대미 AI 투자를 약속한 손정의 소프트뱅크그룹 회장의 눈빛에선 절실함을 넘어선 승부사적 기질이 느껴졌다.

앞서 손 회장은 2019년 7월 방한해 당시 문재인 대통령과 만난 자리에서 “앞으로 한국이 집중해야 할 것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AI”라고 조언했다고 한다. 돌이켜 보면 그때 우리 정부와 기업은 그리 절실하지 않았던 것 같다. 더 안타까운 건 뒤늦게라도 AI에 집중케 할 국가 리더십마저 공백 상태라는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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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우 산업1부 차장 min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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