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에 청사 짓고는 “新도로 축선과 안 맞는다”… 광화문 옮겨버린 일제[염복규의 경성, 서울의 기원]

2 weeks ago 6

조선 상징인 광화문 철거론 불거져… 日 내부서도 반대해 철거 막았지만
총독부 청사를 전통 축선 무시하고, 태평통축 따라 지으며 광화문 이전
광화문통에 일제 관청들 들어서며 조선 육조거리가 ‘일제판’으로 재편

총독부 청사가 준공된 뒤 광화문 자리에는 철제 정문이 설치됐다. 사진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총독부 청사가 준공된 뒤 광화문 자리에는 철제 정문이 설치됐다. 사진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권력 축선 따라 이전된 광화문

1968년 12월 11일, 광화문 준공식이 거행됐다. “겨레의 비운과 더불어 한쪽에 버려졌던 광화문이 이제 소슬히 제자리에 그 우람한 원모습을 나타내게 되었습니다. 이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조상의 빛난 얼과 슬기를 되살려 번영하는 자주국가로서의 자세를 굳건히 하려는 우리의 표상인 것입니다.” (문화재관리국 ‘광화문 복원준공식 행사 계획’, 1968년)》

염복규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염복규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이 말은 정확히 말해 절반만 사실이다. 당시 복원된 광화문은 원래의 모습이 아니라 1960년대의 시대정신을 반영해 콘크리트로 중건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쪽에 버려졌던 광화문이 이제 소슬히 제자리에’ 돌아왔다는 사실만큼은 틀림없다. 40여 년 만의 일이었다. 그렇다면 왜 광화문은 제자리를 떠나야 했을까?

1968년 다시 제자리를 찾은 광화문의 중건식.
사진 출처 국가기록원

1968년 다시 제자리를 찾은 광화문의 중건식. 사진 출처 국가기록원
광화문은 경복궁의 정문이다. 한양도성과 경복궁의 실질적인 설계자인 개국공신 정도전은 이렇게 설명했다.

“이제 오문(午門·광화문)을 정문이라 함은 명령과 정교(政敎)가 다 이 문으로부터 나가게 되니 살펴보고 신실하게 한 뒤에 나가게 되면 참소하는 말이 돌지 못하고, 속여서 꾸미는 말이 의탁할 곳이 없을 것이며, 임금께 아뢰는 것과 명령을 받드는 것이 반드시 이 문으로 들어와 윤허하신 뒤에 들이시면 사특한 일이 나올 수 없고 공로를 상고할 수 있을 것입니다.”(조선왕조실록, 태조 4년 10월 7일)

광화문 앞 대로에는 ‘명령과 정교’를 실행하는 여러 관청이 들어섰다. 서쪽에는 의정부, 이조, 한성부, 호조를 뒀고 동쪽에는 예조, 사헌부, 병조, 형조, 공조를 배치했다. 이른바 ‘육조거리’다. 광화문은 단지 출입문이 아니라 국왕 통치의 무거운 의미를 담은 핵심 상징물이었다.

경복궁 안에 총독부 청사 공사가 한창이던 1921년 5월, 동아일보는 광화문 철거 가능성을 처음 보도했다. “대궐 안에 지금 짓는 총독부가 공사를 마친 후에 오랫동안 많은 역사를 가진 고대의 건축물인 광화문은 헐어버린다는 말이 세상에 있어 애석해하는 사람들이 많은 모양인데 이에 대하여 총독부 건축과장 암정장삼랑(岩井長三郞) 씨는 말하되 총독부 공사가 대정(大正) 13년(1924년)에는 마칠 터이니까 그 안에는 어떻게든지 결정하겠는데 이 문제는 내년 안에는 결정하겠습니다. 본래부터 광화문을 헐어버린다는 말은 공연한 헛소문이올시다. 어데로든지 옮겨야 할 터인데 위치 문제는 결말이 안 난 것이올시다. 세상에서는 그 건축물은 건축학리상 옮길 수 없다는 말이 있으나 결단코 그럴 이치는 없고 돈이 많이 들 뿐이올시다. 총독부의 방침으로는 결단코 헐 이치는 없을 터이요 장차 좋은 곳으로 옮길 터이라 말하더라.”(동아일보, 1921년 5월 24일) 총독부 건축과장의 적극적인 ‘해명’은 오히려 청사 준공과 더불어 광화문 철거 논의가 있었다는 의심을 일으킨다. 그도 그럴 것이 근정전 앞에 청사가 들어서면 경복궁의 대부분의 전각은 건물에 가려지는 반면 광화문이 마치 총독부의 정문처럼 보이게 되기 때문이다.

총독부 고위 관리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렸다. 경무국장 마루야마 쓰루키치(丸山鶴吉)는 “앞으로의 화근을 없애기 위해 광화문을 철거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정무총감 아리요시 주이치(有吉忠一)는 “구태여 민심을 자극하지 말고” 광화문을 옮겨서라도 보존해야 한다는 견해를 내놓았다. ‘앞으로의 화근을 없애기 위해’라는 마루야마의 말에서 총독부가 광화문의 상징성을 의식하고 있었음을 잘 알 수 있다.

이런 가운데 저명한 민예학자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悦)가 잡지 ‘가이조(改造)’ 1922년 9월호에 발표한 ‘사라지려고 하는 한 조선 건축을 위하여(失はれんとする一朝鮮建築の為に)’라는 글이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바야흐로 행해지려고 하는 동양 고건축의 무익한 파괴에 대하여 나는 지금 가슴이 쥐어짜지는 것과 같은 기분을 느낀다. 조선의 중심인 경성에 있는 경복궁을 방문한 적이 없는 사람들은 그 왕궁의 정문인 저 장대한 광화문을 부숴버리는 일에 대해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고 있을지도 모른다. … 이 글은 없어져서는 안 될 한 예술품이 없어져야 할 운명에 처한 데 대한 애석함과 애도의 글이다. 그리고 특히 그것을 만든 민족이 자기들의 목전에서 그것이 파괴되는 것을 어쩔 수 없이 지켜볼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대한 나의 슬픈 감정을 피력한 것이다. … 아아 나는 쇠망해 가는 나라의 고통에 대하여 여기서 새삼스레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반드시 일본의 모든 사람은 이 무모한 소행에 분격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나 꼭 같은 일이 현실로 이미 지금 경성에서 강요된 침묵 앞에서 일어나려 하고 있는 것이다.”

1919년 창간된 ‘가이조’는 당시 일본에서 진보적인 사조를 대표하는 종합잡지로, 상당한 사회적 영향력이 있었다. 게다가 이 글은 동아일보에 한글 번역이 실렸고, ‘The Japan Advertiser’(1890년 미국인 인쇄업자 로버트 메이클존이 요코하마에서 창간한 영자신문)에도 영문 번역으로 실렸다. 이제 광화문을 철거해 아예 없애는 일은 점점 어려워졌다.

경복궁의 정문이던 광화문은 궁 동쪽으로 옮겨졌다. 사진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경복궁의 정문이던 광화문은 궁 동쪽으로 옮겨졌다. 사진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총독부 청사가 준공된 이후에도 광화문의 처리를 두고 한동안 설왕설래가 이어졌다. 이축(移築)을 한다는 원칙은 대강 정해졌지만 그러면 어디로 옮길 것인가? 궁궐 안의 경회루 맞은편, 남산 조선신궁 경내 등 여러 후보지를 검토한 끝에 1927년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 옆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총독부 앞에 광화문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어색해 보인다는 점 외에도 총독부 청사 공사 보고서는 광화문을 옮겨야 하는 보다 구체적인 이유를 밝혔다.

“경복궁 근정전 및 광화문의 위치는 그 건물의 중심선이 앞쪽 광화문 거리의 중심과 일치하지 않고 약간 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따라서 새 청사를 짓는 위치를 경복궁이나 광화문의 중심선과 맞추게 되면 정면도로의 중심선과 어긋나게 됨으로써 그 위용을 살리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태평통 도로 중심선을 새 청사의 중심으로 삼게 된 것이다.”(조선총독부, ‘조선총독부청사신영지’ 61쪽)

즉, 경성역에서 광화문 거리에 이르는 도로인 태평통과 경복궁의 축선이 맞지 않았던 것이다. 태평통은 1910년대 일제가 ‘시구(市區) 개정’으로 개설한 대표적인 새 도로였다. 결국 총독부 청사는 경복궁 경내에 들어섰음에도 궁궐의 전통적인 축선이 아니라 새로 구축된 광화문통∼태평통의 축선에 맞춰서 건립됐다. 또 청사 준공 이후에는 오히려 광화문이 일제가 구축한 전체 도로 축선에 맞지 않는 걸림돌이 돼버린 것이다.

1930년대 말 광화문이 사라진 광화문통에는 일제의 여러 관청이 들어서며 ‘일제판 육조거리’가 됐다. 사진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1930년대 말 광화문이 사라진 광화문통에는 일제의 여러 관청이 들어서며 ‘일제판 육조거리’가 됐다. 사진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흥미롭게도 광화문을 이전한 뒤에도 총독부 앞 대로의 명칭은 여전히 ‘광화문통’이었다. 이 거리에는 조선시대의 육조거리처럼 일제의 여러 관청이 차례로 들어섰다.

“넓기로 동양 제일이라는 광화문통 정면에 현대식 아방궁인 총독부 백악관의 4층 건축물이 시위나 하는 듯이 서 있는 좌우편에 … 소위 경관강습소, 순사교습소, 무슨 회 도장, 무슨 조사소 등등의 간판 붙은 청사와 함께 어깨를 겪고 있는 경성법학전문학교. 옛 같으면 문무백관이 들락날락할 법부 자리에 육법전서 한 권과 노-트 몇 권 든 사각모자가 기운차게 몰려든다.”(6개 전문학교학생 논평, ‘별건곤’, 1930년 12월호)

말하자면 광화문이 사라진 광화문통은 ‘일제판 육조거리’가 된 셈이다. 이렇게 조선시대 이래 최고 권력을 표상해온 가로의 상징성은 지속됐다. 당시 총독이 임석하는 일본 육군기념일 퍼레이드가 늘 광화문통에서 열렸던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염복규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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