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값싸고 믿을 만한’ 외국인 이모가 있을까? [주애진의 적자생존]

4 weeks ago 13

초고령사회가 시작됐습니다. 정부는 저출생, 고령화를 ‘극복’할 대책을 쏟아내고 있지만 지금 필요한 건 ‘적응’과 ‘변화’ 아닐까요. ‘적자생존’은 달라진 인구구조에 적응해야 살아남는다는 뜻입니다. 우리 사회가 초고령화에 적응하기 위해 고민해야 할 문제를 이야기합니다.

지난해 9월 한 필리핀 가사관리사가 일하는 모습.  사진 출처 서울시 홈페이지

지난해 9월 한 필리핀 가사관리사가 일하는 모습. 사진 출처 서울시 홈페이지

“필리핀 가사관리사 월급이 300만 원이면 한국 사람을 고용하는 것보다 더 비싼 거 아닌가요?”

최근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이 같은 글이 올라왔다. 지난해 9월 고용노동부와 서울시가 시작한 필리핀 가사관리사 시범사업이 올해 3월 연장되면서 시간당 이용 요금이 1만3940원에서 1만6800원으로 올랐다. 한 달로 따지면 약 292만 원이다. 이 때문에 해당 사업이 월 300만 원짜리 ‘강남 이모님’으로 변질됐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필리핀 가사관리사 사업이 애초 기대한 만큼 돌봄 비용 완화 효과를 내지 못하자 정부가 이번에는 ‘가사사용인’ 제도를 꺼냈다. 지난달 24일 법무부와 서울시는 최저임금이 적용되지 않는 외국인 가사사용인 시범사업을 시작했다. 초고령사회에 필수적인 외국 인력은 무조건 싸면 좋은 걸까.

● ‘필리핀 이모’ 월급은 210만 원

필리핀 가사관리사들의 월급은 올해 딱 최저임금 인상 폭(1.7%)만큼 올랐다. 하루 8시간, 주 5일 기준 지난해 월 206만740원에서 올해 209만6270원으로. 서울시는 올해 초 이들의 월 급여가 각자 일한 시간에 따라 154만~283만 원으로, 평균 207만 원이라고 밝혔다. 월 283만 원을 받은 사람은 그만큼 추가로 근무했다.

가정에서 내는 이용료는 이들의 인건비에 가사관리사를 고용한 민간 업체의 운영비를 더해 책정된다. 이용료가 오른 건 그동안 시범사업 명목으로 업체가 이윤을 거의 붙이지 않았고, 서울시도 예산을 지원했는데 이를 ‘정상화’했기 때문이다. 업체 운영비에는 올해부터 1년 이상 일한 가사관리사의 퇴직금도 포함될 것이다. 하지만 이를 월급 인상으로 보기는 어렵다.

필리핀 가사관리사들이 월 300만 원을 받는다는 잘못된 인식이 퍼진 데는 언론의 잘못도 있다. ‘필리핀 이모 월급 300만 원’이라는 제목을 붙인 언론 보도가 쏟아졌기 때문이다. 물론 서비스 이용자의 관점에선 이들의 실제 월급보다 이용료가 더 중요하다. 가뜩이나 서울 강남권에 사는 고소득 가정의 이용률이 높은데 이용료까지 올랐으니 비판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서울시에 따르면 비슷한 수준의 내국인 가사관리사 이용료는 시간당 1만8000~2만 원 선이다. 한국은 국제노동기구(ILO)의 차별 금지 협약을 비준했기 때문에 내국인과 외국인에게 똑같은 최저임금을 적용해야 한다. 가사관리사 월급을 깎는 방식으로는 비용을 줄이는 데 한계가 있다.

● 외국인 가사사용인도 실효성 의문

외국인 가사관리사 비용을 낮추려다 보니 가사사용인이라는 케케묵은 제도까지 등장했다. 서울시는 법무부와 함께 지난달 24일부터 개별 가정에서 가사·육아를 맡아 시간제로 일할 외국인을 모집하고 있다. 대상은 국내 교육기관 유학생(D-2)과 졸업생(D-10-1), 결혼이민자 가족(F-1-5), 외국인 근로자 등의 배우자(F-3) 자격(비자)을 가진 외국인이다. 서울시는 신청자에 한해 가사사용인 취업을 허용하고, 일정한 교육을 거쳐 6월부터 민간 중개업체를 통해 원하는 가정과 연결한다는 계획이다.

가사사용인이란 가정교사나 가사도우미처럼 일반 가정에서 사적인 계약을 맺고 일하는 사람이다. 국가의 관리, 감독이 어려운 탓에 근로기준법과 최저임금법이 적용되지 않는다. 현재 중국동포(조선족) 등 일부 외국인만 가사사용인으로 취업할 수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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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와 서울시는 최저임금을 적용받지 않는 외국인 가사사용인을 도입하면 아동 돌봄 비용을 더 낮출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낮은 비용만 고민한 탓에 등장한 일종의 편법이다. 국가가 관리하기 어려워 예외적으로 노동관계법을 적용하지 않는 가사사용인을 정부가 나서서 제도화하는 모순적인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한국노동조합총연맹은 “법적 규제의 사각지대를 확산해 노동시장을 왜곡할 가능성이 크다”며 시범사업을 취소하라고 촉구했다.

이 사업의 효과 역시 부정적으로 보는 전문가들이 많다. 필리핀 가사관리사에 대해서는 한국 정부가 범죄 경력, 돌봄 자격증 보유 여부 등을 검증해서 선발한 뒤 필요한 교육까지 제공했다. 반면 가사사용인의 경우 개별 가정이나 민간 중개업체가 일일이 확인하고 책임져야 한다. 일하기를 원하는 외국인 유학생 등이 아이 돌봄에 얼마나 전문성이 있는지 확인하기도 어렵다. 구인 부담은 커지는데 돌봄의 질은 오히려 떨어질 수 있다.

최저임금보다 낮은 시급을 주는 가정에서 일하려는 ‘믿을만한’ 외국인이 얼마나 많을지도 미지수다. 아이 돌보는 일이 쉽지 않은데 편의점이나 식당에서 아르바이트할 수 있는 유학생이라면 후자를 택할 가능성이 크다. 이용 가정의 비용 부담을 대폭 낮추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 외국인 활용, 정공법 택해야

정부는 정책 목표부터 다시 점검해야 한다. 처음 외국인 가사관리사를 도입할 때 고용부는 돌봄 인력 확대와 비용 부담 완화라는 두 가지 목표를 내세웠다. 고령화된 내국인 아동 돌봄 인력이 갈수록 줄어드니 이를 보완하고, 조금 더 저렴한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취지였다. 통계청에 따르면 내국인 가사·육아 취업자는 2014년 상반기(1~6월) 23만9000명에서 2024년 상반기 11만5000명으로 줄었다. 50대 이상인 취업자 비중은 90%를 넘는다. 외국인 활용이 불가피하지만 이를 통해 비용 문제까지 한꺼번에 해결하려는 안이한 생각이 정책 실패로 이어졌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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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전문가는 돌봄 비용을 덜어주는 최선책으로 공공돌봄 확대를 꼽는다. 국공립어린이집 같은 양질의 공공돌봄시설을 늘리고, 개별 돌봄이 필요한 가정엔 바우처 등의 형태로 비용을 지원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최저임금 우회 같은 방식으로 노동시장을 왜곡하지 않으면서 돌봄 비용을 낮출 수 있다. 필요한 예산은 연 50조 원에 이르는 저출산 대응 예산 중 불필요한 사업만 정리해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장기적으로는 유연한 근로환경을 조성해 부모가 내 손으로 아이를 키울 수 있는 환경도 만들어야 한다.

정부는 ‘값싼’ 외국 인력을 시장에 제공하는 방식으로 돈과 시간을 들이지 않고 손쉽게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말고 정공법을 택해야 한다. 가사관리사뿐만 아니다. 초고령사회가 된 한국에선 앞으로 요양보호사를 포함해 더 많은 외국 일손이 필요해질 것이다. 이런 식의 땜질 처방만 반복하면 머지않은 미래에 더 비싼 대가를 치를 수 있다.

주애진 기자 ja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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