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발생한 관동 대지진 직후 당시 일본 제국 정부가 일본에 거주중이던 재일 조선인 학생들의 귀국을 막는 등 조선인 대상 경계를 강화했음을 알려주는 사료가 확인된 것으로 전해졌다.
4일 일본 마이니치신문(마이니치)은 문부과학성이 보관해 왔던 ‘관동 대지진 피해 상황 조사 선인(鮮人) 학생 구호 일건 서류’를 근거로 관동 대지진 이후 일본 정부가 벌인 조선인 학생 조사 내용을 소개했다.
마이니치 보도에 따르면 문부과학성 전신인 옛 문부성은 관동 대지진 직후 ‘조선학생 구호부’를 설치했다.
관동대지진 9일 뒤인 1923년 9월 10일 업무를 시작한 구호부는 문부성 출장소에 협력을 구하며 경찰 등을 상대로 조선인 학생 감시 방법을 청취했다.
신주쿠출장소 기록에 따르면 육군 시설이었던 나카노 병영에서 그해 9월 11일까지 시멘트를 운반해야 했던 조선인 학생이 귀국을 신청하자 군인이 “너희는 도쿄에서 일어난 선인(조선인) 학살 규모를 귀국 후 퍼뜨릴 것이므로 귀국시키기 어렵다”고 언급한 것으로 알려졌다.
마이니치는 “경시청에도 조선인 귀국을 ‘저지’하도록 여러 차례 전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며 “한반도 통치에 미칠 영향을 경계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어 “한반도에서도 당시 학살을 둘러싼 발언을 ‘불온한 언동과 유언비어’라며 단속하고 있었다”고 덧붙였다.
다만 시부야출장소가 정리한 재해 피해 학생 명부에는 성명, 소속 학교 등이 기재돼 있고, 학생에게 쌀과 된장 등 지원 물자를 배급했다는 기록도 있다고 이 신문은 전했다.
도노무라 마사루 도쿄대 교수는 “조선인 유학생만을 대상으로 한 행정당국 활동이 있었다는 것은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며 “(일본이 조선인 학생을) 지원하는 한편으로 (조선인 활동이) 민중운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경계했다는 것이 언뜻 보인다”고 평가했다.
마이니치는 해당 사료에 대해 “배타적인 공기에 싸여 있던 당시 도쿄의 모습이 생생하게 전해진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관동 대지진 직후 일본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했고 일본 사회에는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라거나 ‘방화한다’ 같은 유언비어가 유포됐다. 이러한 헛소문으로 약 6000명으로 추산되는 조선인이 살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당시 조선인 학살에 대해 사실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기록이 발견되지 않았다며 구체적인 언급을 회피해 왔다. 특히 일본 우익 세력들은 조선인 학살 사실을 축소하는 경향을 보여와 한국의 반발을 샀다.
일부 정치인들은 학살 존재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 같은 경향은 최근 일본 사회의 우경화와 함께 역사수정주의 움직임과 맞물려 뚜렷해져왔다.
예컨데, 현 도쿄도지사인 고이케 유리코는 2017년 이후 관동 대지진 당시 조선인 희생자에 대한 추도문 발송을 거부해 오고 있다. 아직 고이케 지사가 공적인 자리에서 학살 사실을 명시적으로 부정한 적은 없지만, 그의 일련의 행보들은 사실상 학살 사실을 인정하지 않거나 회피하는 것들로 해석돼 논란을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