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로 만든 장면마다 '워터마크 딱지'…"K콘텐츠 완성도 추락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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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인공지능(AI) 기본법 시행을 ‘내년 1월’로 못 박자 각 산업 영역에서 논란이 일고 있다. 영화, 드라마, 웹툰 등 콘텐츠에 워터마크 표시를 서둘러 도입하려는 것이 대표 사례다. 인공지능이 생성한 장면에 ‘AI 기술을 활용했다’는 표시를 의무화하는 제도다. ‘세계 첫 시행’이라는 성과를 내려다가 자칫 K컬처 열풍에 찬물을 끼얹을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AI로 만든 장면마다 '워터마크 딱지'…"K콘텐츠 완성도 추락할 것"

10일 정부 및 업계에 따르면 예정대로 AI 기본법이 내년 1월 22일 시행되면 한국은 AI산업을 법률로 전면 규제하는 첫 번째 국가가 된다. 유럽연합(EU)의 인공지능법(AI Act)에 비해 제정은 늦었지만, 전면 시행은 한발 앞선다. 이대로라면 워터마크는 한국이 가장 먼저 도입하는 셈이다.

이에 대해 주무 부처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관계자는 “정부가 가이드라인 등 실제 시행안을 공개하지 않아 우려가 큰 것일 뿐 ‘이런 것까지 할 필요가 있나?’라는 의문이 드는 사례에는 예외를 둘 수 있도록 산업계 의견을 청취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업계에선 속도 조절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계속 나온다. 대통령이 위원장인 국가AI위원회가 수개월간 작동하지 못해 조율 과정이 없는 데다 EU 등 다른 나라의 규제 효과를 지켜본 뒤 시행해도 늦지 않다는 것이다. EU의 워터마크 시행은 내년 8월로 예정돼 있다.

AI뿐만 아니라 로봇, 6세대(6G) 통신 등 첨단 산업과 관련한 정부의 육성 및 규제 정책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가 강력한 드라이브를 건 휴머노이드 중심의 로봇 정책에 대해 한 로봇 연구자는 “로봇은 분야가 매우 다양하고 어떤 영역에서 잭팟이 터질지 알 수 없다”며 “휴머노이드만 콕 찍어서 지원을 집중하는 것은 오판”이라고 지적했다.

전 세계 유일 'AI 표시제' 강행…정부 섣부른 '세계1등' 조급증

AI로 만든 장면마다 '워터마크 딱지'…"K콘텐츠 완성도 추락할 것"

“정부가 6세대(6G) 통신에서 세계 1등을 하겠다고 발표할까 봐 조마조마하네요.” 최근 만난 국내 통신업체 고위 임원의 얘기다. 그는 “통신사들이 기업고객의 인공지능(AI) 전환(AX)이라는 새로운 사업모델에 투자를 집중하고 있는데 정부가 혹시라도 6G 인프라 투자를 독촉하면 계획에 차질이 빚어질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한국은 부호분할다중접속(CDMA) 기술과 5G를 세계 최초로 상용화한 국가다. 각각 1996년과 2019년의 일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AI와 결합한 차세대 통신인 6G에서도 ‘세계 최초’ 기록을 달성하는 것을 내부 목표로 삼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공론화 시간 부족했던 AI 기본법

미래를 주도할 첨단 산업에 대한 정부의 육성 및 규제 정책이 성과 중심의 조급증에 휘둘리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AI 기본법만 해도 제정 당시부터 지나치게 서두른다는 지적을 받았다. AI 기본법 제31조는 ‘콘텐츠에 보조적으로라도 AI 기술을 활용할 경우 이를 고지해야 하는 표시 의무를 갖는다’고 명시돼 있다. 이대로 내년 1월 워터마크 제도가 시행된다면 지난해 드라마 ‘카지노’에서 60대 배우 최민식이 선보인 30대 시절 연기 장면엔 ‘AI 기술을 활용했다’는 문구가 붙는다.

국회 관계자는 “사실관계를 조작하거나 타인에게 손해를 끼칠 목적으로 만들어지는 딥페이크를 예방하려는 취지로 넣은 조항”이라며 “법안 처리를 서두르는 과정에서 콘텐츠 등 관련 영향을 받는 업계의 의견 수렴을 제대로 거치지 못한 측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특수영상 촬영 등 콘텐츠 후반 작업에 AI 기술을 활용하는 특수효과(VFX) 전문기업 웨스트월드 관계자는 “워터마크 도입을 법안에 명시하면서 공론화 과정이 전혀 없었다”고 아쉬워했다.

콘텐츠업계 또 다른 관계자는 “요즘은 컴퓨터그래픽(CG)이라고 일컫던 작업 대부분에 AI 툴을 적용한다”며 “사실상 모든 콘텐츠 장면에 각주처럼 표시해야 하는 셈인데 어떤 시청자가 몰입해서 보겠느냐”고 말했다. 이에 대해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관계자는 “가이드라인을 통해 산업계 의견을 충분히 반영할 것”이라고 해명했다.

◇ 첨단 산업엔 육성책도 고민 필요

전문가들은 기술 변화 속도가 전례 없이 빠른 터라 정부가 좀 더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핵융합 기술이 대표 사례다. 정부는 유럽연합(EU)이 주도하는 초대형 시설인 국제핵융합실험로(ITER)에 2000년대 초반부터 참여했는데 기술 흐름이 초대형에서 소형으로 바뀌며 딜레마에 빠졌다. 록히드마틴과 오픈AI, 마이크로소프트 등 미국 주요 기업은 초소형 핵융합 기술에 집중하고 있다.

정부가 AI 인프라 확충의 방법으로 엔비디아의 AI 학습용 그래픽처리장치(GPU)만 구매하려는 것을 두고도 반도체업계의 불만이 쏟아지고 있다. ‘엔비디아 종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체 AI 칩을 만들려는 흐름과 배치된다는 비판이다.

신경망처리장치(NPU) AI 반도체 스타트업 리벨리온의 박성현 대표는 최근 페이스북에 “이번 추가경정예산안에서 GPU 확보만 이야기되는 것이 무척 아쉽다”며 “소수 물량이라도 추론형 NPU, 비(非)엔비디아 제품이 인프라에 포함됐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문제를 제기했다. NPU는 인간 두뇌의 신경망을 모방한 AI 반도체로 추론 영역에 특화돼 있다. 중국의 딥시크만 해도 훈련은 엔비디아 GPU를 사용했지만 추론 트래픽은 화웨이의 NPU 어센드910을 활용했다. 조규진 서울대 기계공학부 교수는 “중국 로봇산업이 미국을 능가할 정도로 빠르게 성장하는 것은 교육부터 부품·소재 등 공급망 관리, 자금 지원까지 전체적인 생태계를 오랜 기간 조성한 결과”라며 “첨단 산업 육성 및 규제 정책을 어떻게 할 것인지 원점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지은/고은이 기자

>> 워터마크
워터마크 인공지능(AI)이 생성한 콘텐츠에 이를 식별할 수 있도록 삽입하는 디지털 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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