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 바퀴 문자 화폐' 출간 … 경영학 거두 채서일 인터뷰
인류사 움직인 4개의 힘은
에너지와 유통·정보·자본
송, 유럽보다 700년 앞섰지만
결국 산업혁명은 유럽서 시작
기업, 인간이 만든 최고 발명품
스스로 길을 내야만 살아남아
기차에 몸을 실은 자는, 자신이 탄 기차의 전모를 조망할 수 없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기차 밖으로 걸어나가 인류라는 이름의 기차가 어디에서 출발했고 또 어디로 향하는지 한눈에 바라보는 사상가들에게 이끌려 왔다. '총, 균, 쇠'의 제러드 다이아몬드, '사피엔스'의 유발 하라리가 그랬다. 그들은 우리 자신을 내부 풍경이 아닌 외부 시선에서 관찰한 이들이었다.
채서일 고려대 명예교수의 신간 '불 바퀴 문자 화폐' 역시 저들의 계보를 잇는다. 다만 하라리가 '인간은 어디에서 왔는가'를, 다이아몬드는 '왜 어떤 문명은 더 앞섰는가'를 질문했다면 채 교수는 '인간이 만든 최고의 발명품인 기업은 어디로 가는가'에 몰입한다. 최근 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기업은 영원한 생명을 지니는 유기체다. 기업은 인류 최고의 걸작이라고 생각해 왔다. 어떤 기업은 살아남고 어떤 기업은 사라졌는데, 유행하는 경영 전략은 몇 년이면 바뀐다. 그렇다면 수많은 전략과 사례 밑에, 불변하는 더 깊은 강이 있지 않을까를 고민했다. 강의 바닥까지 내려가야 유기체로서의 기업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책 '불 바퀴 문자 화폐'는 150만년의 인류사를 탁자 위에 올려두고 제목처럼 네 키워드를 간파해낸다. 그에 따르면 불은 에너지를, 바퀴는 유통을, 문자는 정보를, 화폐는 자본을 상징하는 네 개의 축이다. 인류는 불로 자연을 정복했고, 바퀴로 거리를, 문자로 망각을, 화폐로 불신을 역시 이겨냈다. 동물도 도구를 쓴다. 그러나 에너지를 근육에서, 이동을 다리에서, 기억을 뇌에서, 신뢰를 관계에서 떼어내 몸 밖에 축적한 건 인간뿐이었다.
채 교수는 '네 번의 분리'가 문명을 추동했다고 본다. 네 요소는 서로 융합한다. 그 거대한 진화의 궤적과 구조 속에서 '포식자'는 교체돼 왔다. "불, 바퀴, 문자, 화폐는 서로를 끌어당기며 함께 진화해 하나의 생태계를 이루었다. 불이 강해지면 더 많은 물자가 생겼고, 그것을 나르려 바퀴가, 거래를 기록하려 문자가, 이윽고 가치를 저장하려 화폐가 따라왔다. 이를테면 '공진화'다. 기술만 갖고 있다고 해서 공진화에서 살아남은 건 아니었다. 송과 유럽의 대비가 이를 증거한다."
채 교수는 이번 책에서 송이 18세기 유럽이 도달한 수준을 700년 앞서 달성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주철 생산에 능했고 대규모 물레방아가 인간의 노동력을 대신해 산업을 일궜으며, 정교한 운하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심지어 지폐까지 보유했다. 그러나 산업혁명의 주인공은 송이 아니었다.
"송이 혁신을 못 이룬 건 역설적으로 너무 풍요로웠기 때문이다. 송의 강력한 관료제는 모든 것을 안정적으로 통제했다. 송은 혁신을 버리고 수성의 길로 들어섰다. 반면 유럽은 결핍이 컸다. 뗄 나무가 없으니 영국이 산업혁명을 일으킨 것처럼 말이다. 살아 있는 유기체가 욕구를 잃으면 더 이상 진화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은 안전한가?"
채 교수는 이어 "송의 관료제가 21세기 한국에서는 '규제'의 얼굴로 되살아났다고 본다"며 한국을 진단한다. "규제와 안전만 좇는 금융은 '가보지 않은 길'에 자본을 대지 못한다. 변이가 태어나도 선택하고 키워줄 회로가 없다는 뜻이다. 또 사회 각 섹터의 욕망이 너무 커져서 누구도 양보하려 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부족한 건 기술이 아니다. 부족한 건 그 기술을 한 방향으로 묶어낼 목적과 용기다."
인류사를 총망라하는 이번 책의 제2장 '바퀴' 편에는 콜럼버스와 마젤란이 탔던 소형 범선 '카라벨선'이 중심 소재로 등장한다. 채 교수가 말하는 바퀴는 단지 땅 위의 이동수단이 아니라 "거리와 마찰을 극복하는 모든 이동 기술의 총칭"이다. 카라벨선은 빠른 배가 아니었다. 그러나 세계의 항로를 정의하고 권력을 바꿔버린 도구였다. 그렇다면 21세기 한국의 카라벨선은 무엇일까. 어떤 갑판 위에 설것인가.
"카라벨선은 빠르진 않아도 새 항로 자체를 정의했다. '무엇이 빠른가'가 아니라 '무엇이 새 항로를 정의하는가'를 고민해야 한다. '21세기 카라벨선'에 대한 내 답은 인공지능(AI)이다. AI는 데이터의 바다를 항해하는 배이며, 그 배로 먼저 항로를 연 소수가 표준을 쥐고, 뒤따르는 이들은 통행료를 낸다. 항로를 여는 데는 좋은 배만으론 부족하다. 가보지 않은 바다로 나서는 용기, 난파를 감수하는 자본, 선원들의 모험심이 있어야 한다. 앞서 말한 규제와 보신적 금융, 갑질 같은 것이 우리 배의 닻을 내려놓고 있다. 기술이라는 돛은 세계 최고인데, 정작 출항을 막는 것은 그 닻들인 것이다."
'빠른 추격'은 한국 기업이 걸어온 과거의 길이었다. 채 교수는 앞으로의 게임은 추격이 아니라 "길을 내는 자(Path Maker)"라고 강설했다.
"패스트 팔로어는 남이 이미 낸 길을 더 빠르게 따라가는 전략이다. 먼저 가든 따라 가든, 남이 정한 목적지를 향하는 한 그것은 여전히 추격의 게임이다. '어떻게 더 잘 만들까'에서 '무엇을 왜 만들까'로 질문은 바뀌어야 한다. 패스트 팔로어가 남이 낸 답을 빨리 푸는 전략이었다면 이제 우리는 질문을 던지는 자여야 한다."
※ 채서일 고려대 명예교수 인터뷰 전문은 매일경제 홈페이지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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