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전 관계로 임신”···집단 난교도 두려워 않는 이 동물의 신비 [생색(生色)]

2 weeks ago 9

[생색-33] 아장아장, 갓난아기들 여럿이 모여 있습니다. 순백의 아이들은 호기심 넘치는 표정입니다. 호불호 없이 세상을 눈으로 담아내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그들 앞에 엄숙한 표정을 짓는 어른 몇몇이 도착해 가방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냅니다. 그림 카드였습니다.

꽃과 물고기 그림을 본 아이들은 배시시 웃으며 눈을 떼지 못합니다. 몇몇은 손을 뻗어 품으려는 노력도 해봅니다. 이윽고 등장한 다음 카드. 무시무시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뱀과 거미입니다. 동공이 커지고,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합니다.

독일 막스플랑크 연구소와 스웨덴 웁살라 대학의 공동연구였습니다. 주제는 ‘뱀에 대한 공포는 학습인가, 본능인가.’ 생후 6개월 이전 아기들이 뱀을 처음 봤을 때 어떤 반응인가를 관찰한 것이지요.

“아담, 저 뱀이 맛있는 과일을 줬는데.” 피터 폴 루벤스가 1615년 묘사한 ‘에덴동산에서 남자의 몰락’.

“아담, 저 뱀이 맛있는 과일을 줬는데.” 피터 폴 루벤스가 1615년 묘사한 ‘에덴동산에서 남자의 몰락’.

아직 학습능력이 없는 아이들을 관찰함으로써, 뱀을 향한 공포가 우리 DNA에 내재해 있는지를 테스트한 것입니다. 연구진은 결론 내립니다. “우리 인간은 뱀을 본능적으로 두려워한다.”

인류의 고전 중 하나인 성경 속 에덴동산에 뱀이 부정적인 존재로 그려진 데에는 인간의 본능적 공포심이 자리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뱀이 무서운 건 단순히 날카로운 이빨, 치명적인 독 때문만은 아닙니다. 몇몇 종들의 ‘교미’ 장면은 더욱 그로테스크합니다. 집단으로 뭉쳐 그야말로 난교가 이뤄지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낯선 장면이지만, 나름의 사정은 있습니다. 그들의 침실 속으로 들어가 봅니다. “스르륵”.

“그 뱀새끼만 아니었어도...” 낙원에서의 추방. 프랑스 화가 제임스 티소의 작품.

“그 뱀새끼만 아니었어도...” 낙원에서의 추방. 프랑스 화가 제임스 티소의 작품.

굵직한 실뭉치...알고보니 교미하는 뱀?

여기 굵직한 실뭉치가 보입니다. 이내 실이 아님을 알아챕니다. 이리저리 실이라고 하기엔 뭉치가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들은 굵은 뱀 무리였습니다.

뱀이 뭉쳐 있는 이유는 단 하나. 짝짓기를 위해서입니다. 수컷 여러마리가 암컷 한 마리를 차지하기 위해 달려든 것입니다. 마치 공처럼 집단으로 교미가 이뤄지는 탓에 ‘메이팅볼(Mating Ball·짝짓기공)’로 불리기도 합니다.

“여긴 취재금지 구역입니다만.” 가터뱀의 ‘메이팅볼’ . [사진출처=Oregon State University]

“여긴 취재금지 구역입니다만.” 가터뱀의 ‘메이팅볼’ . [사진출처=Oregon State University]

붉은가터뱀의 경우 수컷 100마리가 암컷 한 마리와 교미하는 장면이 목격되기도 했습니다. 인간의 도덕성을 기준으로 보면 그야말로 ‘짐승의 짓’이지요. 뱀 중 약 10종이 이런 식의 교미 방법을 보이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가터뱀과 아나콘다도 이 중 하나입니다.

이유있는 난교...겨울잠이 원인?

이들이 괴이한 교미 방법을 택한 필연적 이유가 있습니다. ‘겨울잠’이 원인입니다. 겨울잠을 잔다는 건 1년 중 적어도 4~5개월은 교미를 할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짧은 시간에 제 짝을 찾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수컷 뱀들은 실제로 엄청난 번식 압박에 시달립니다. 겨울잠을 암컷보다 적게 잘 정도입니다. 성욕이 수면욕을 이긴 셈. 겨울잠을 자는 두꺼비나 일부 파충류·양서류 중 일부도 이처럼 교미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지금 요롱이 만나러 가는 길인데요, 아저씨.” [사진출처=Eunectes murinus]

“지금 요롱이 만나러 가는 길인데요, 아저씨.” [사진출처=Eunectes murinus]

다시 뱀의 세계로. 잠에서 깬 수컷들은 이제 차례차례 암컷이 일어나기를 기다립니다. 기지개를 켜는 암컷들을 향해 수컷이 집단으로 달려듭니다. 뱀의 성비가 비슷한데도, 교미에서만큼은 다수 수컷이 한 암컷을 대상으로 교미가 이뤄집니다. 나머지 암컷은 아직 침실에서 쌔근쌔근 잠을 자는 중이지요. 침실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모른 채.

암컷 흉내를 내는 수컷 뱀이 있다?

눈치싸움으로 치밀한 계략이 난무하기도 합니다. 한 수컷 녀석은 암컷 페로몬을 방출하면서 다른 수컷을 유인한 뒤 본인이 암컷에게 가장 빨리 달려가기도 합니다. 육체적 격돌을 넘어서 치열한 두뇌 싸움을 벌이는 것이지요. 가짜 암컷 페로몬을 내뿜는 수컷은 순진한 놈들보다 더 많이 짝짓기에 성공했다는 연구결과도 있습니다.

“눈을 그윽하게 뜨면 암컷으로 보이려나...” 그린 아나콘다.  [사진출처=Daniel10ortegaven]

“눈을 그윽하게 뜨면 암컷으로 보이려나...” 그린 아나콘다. [사진출처=Daniel10ortegaven]

교미가 한창인 침실 속 이불까지 들춰봅니다. 평소 품고 있던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서입니다. 팔도, 다리도, 제3의 다리(성기)도 도통 안 보이는 뱀 수컷은 어떻게 사랑을 나누는지(저만 궁금했다면 죄송합니다).

눈에 안 보인다고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닙니다. 수컷 녀석들은 신사처럼 남성성을 몸 내부에 품고 다닙니다. 신사가 정장 속에 무기를 품듯 이들은 비늘 속에 무기를 감춥니다. 진정 필요한 순간에 그것을 한 번에 꺼냅니다. 누구보다 멋진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지요.

이 녀석의 비밀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수컷의 성기가 두 개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한꺼번에 사용하는 건 아니지만, 암컷의 반응이나 신체 위치에 따라 적절한 녀석을 사용합니다. 생물계의 ‘이도류’라고 해야 할까요.

“오타니만 이도류가 아니라네 하하.” 미국 서부 다이아몬드백 방울뱀( Crotalus atrox ) 의 반음경. 성기가 두 개다. [사진출처=테스 손튼]

“오타니만 이도류가 아니라네 하하.” 미국 서부 다이아몬드백 방울뱀( Crotalus atrox ) 의 반음경. 성기가 두 개다. [사진출처=테스 손튼]

뱀의 다리 사족...그러나 사랑엔 필수다

심지어 수컷 아나콘다에겐 저항하는 암컷을 제압하기 위한 기관도 있습니다. 갈고리와 같은 모양의 ‘골반박차(Pelvic spurs)’입니다. 교미때마다 암컷의 자세를 고정하는 아주 고약한 도구지요. 물론 수컷에겐 교미 성공률을 높이는 고마운 기관입니다.

보아뱀의 골반박차. 퇴화된 다리는 교미에 요긴하게 사용된다. [사진출처=Stean3345]

보아뱀의 골반박차. 퇴화된 다리는 교미에 요긴하게 사용된다. [사진출처=Stean3345]

학자들은 이것이 과거 뱀의 다리(먼 옛날 뱀은 도마뱀과 비슷한 모습이었습니다)였다고 분석합니다. 다리는 퇴화해버렸지만 결정적 교미 순간에 적절히 활용되는 것이지요.

사족(뱀의 다리)은 쓸데없는 군짓을 일컫지만, 실제로 엄청나게 중요한 기관인 셈입니다. 반면 암컷 뱀 대부분은 다리가 완벽히 퇴화해 골반박차를 가진 녀석이 거의 없다시피합니다. 수컷에게만 남은 ‘징표’이자 ‘성기구’인 셈. 수컷의 교미본능이 이렇게나 무섭습니다.

암컷은 당하기만 하나...신이 주신 위대한 ‘방패’

암컷에 측은한 마음이 들기 시작합니다.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수컷에게 둘러싸여 몹쓸 짓을 당했다는 생각에서입니다. 자연은 그러나 한쪽 일방에게 막강한 권력을 부여하진 않습니다. 암컷에 위대한 신비를 선물하기 때문입니다.

교미가 끝난 암컷. 수컷들은 의기양양하게 암컷이 자신의 새끼를 뱄다고 자신합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몇 달이 지나도 암컷의 배가 불러오지 않습니다.

“내가 네 아이를 낳아줄 거라 착각하지마.”  [사진출처=니콜라스 루플리]

“내가 네 아이를 낳아줄 거라 착각하지마.” [사진출처=니콜라스 루플리]

교미를 안 한 지 몇 달 후 암컷의 배가 볼록합니다. 임신입니다. 자신의 몸 속에 들어 온 정자를 보관했다가, 가장 괜찮은 녀석의 씨앗을 고른 것이지요. ‘선택적 수정’입니다.

봄 교미 때 모아놓은 정자들과, 가을 교미 때 모아 놓은 정자 중 선택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그들이 정자를 체내에 보관할 수 있는 기간은 최대 5년에 달합니다. 마치 정자은행에서 신중히 양질의 정자를 고르는 모습입니다.

“작년에 틴더로 만난 블랙맘바가 잘생겼었지. 걔 새끼를 낳아볼까.”  [사진출처=Steve Jurvetson]

“작년에 틴더로 만난 블랙맘바가 잘생겼었지. 걔 새끼를 낳아볼까.” [사진출처=Steve Jurvetson]

기왕이면 낳을 새끼, 조금이라도 잘생기고 튼튼한 녀석을 선택하려는 것이지요. ‘메이팅볼’이 집단 강간처럼 보이지만, 암컷에게는 양질의 정자를 고를 수 있는 선택권을 주기도 하는 셈입니다. 짝이 영 변변찮으면 무성생식으로 알을 낳기도 합니다. 처녀생식은 성경 속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수컷의 성공적인 교미가 반드시 번식으로 이어지지는 않게 되는 셈입니다. 자연은 그렇게 기울어진 추의 균형을 맞춥니다. 동시에 인간의 도덕관을 초월하는 세계를 구현합니다. 그러니, 그저 경이로운 눈으로 자연의 세계를 지켜볼 밖에.

르네상스 화가 카라바조의 메두사(1597년 작품). 뱀 머리카락을 한 모습을 인상적으로 구현했다. 뱀은 이렇듯 우리에게 끊임없는 영감을 줘왔다.

르네상스 화가 카라바조의 메두사(1597년 작품). 뱀 머리카락을 한 모습을 인상적으로 구현했다. 뱀은 이렇듯 우리에게 끊임없는 영감을 줘왔다.

<세줄요약>

ㅇ뱀은 수십마리가 공모양으로 난교를 하는데, 대부분은 수컷이다.

ㅇ겨울잠으로 교미 기간이 짧아 번식 경쟁률이 높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ㅇ암컷은 5년간 정자를 보관하면서 선택적으로 수정할 수 있는 신비한 능력을 갖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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