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조차 멈추게 되는 순간이 있었다. 스무 해 전 대학생 자원봉사자로 하콘에 들어와 처음 무용 공연 리허설을 지켜보던 자리에서의 일이다. 박창수 선생님은 당시 무용단의 음악감독이셨고, 덕분에 나는 운 좋게도 무용 공연의 현장을 여러 번 경험할 수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대학생에게, 게다가 무용을 동경의 대상으로 여겨왔던 내게 그곳은 그저 눈에 담는 모든 것이 공부였다. 음악과 조명을 점검하고 동선을 가다듬으며 무대를 진두지휘하는 안무가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스태프들의 모습은 경이로웠다.
무엇보다 큰 깨달음은, 무용이 단순히 ‘움직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때로는 한 걸음씩 천천히 내딛고, 때로는 온몸을 격렬하게 내던지는 무용수들의 몸짓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나조차도 숨을 죽이게 되는 순간이 왔을 때 알았다. 무용수에게 몸을 다스리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바로 ‘호흡’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하콘에서 만난 무용
하우스콘서트는 오래전부터 다양한 장르를 다뤄왔다. 클래식 음악 외에도 다양한 음악 장르는 물론, 무용·연극·영화 등 다른 예술 분야까지 포함되었다. 다양한 예술 장르가 만나고 교류하며, 새로운 시도를 만들어 나가는 예술가들의 살롱을 늘 지향해 온 것이다. 그중에서도 하우스콘서트와 가장 가까운 장르가 있다면 당연히 무용이다.
하콘에서 만난 무용은 현대무용, 한국무용, 부토(일본 아방가르드 무용) 등 그 종류도 다양했다. 그리고 이들의 움직임을 크고 화려한 무대가 아닌, 하우스콘서트의 소박한 장소에서 만나는 것은 무척 특별한 일이었다. 연주자들의 음악을 1~2m 앞에서 듣는 것은 어느새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지만, 무용수들의 호흡과 몸짓, 미세한 표정까지 바로 눈앞에서 마주할 수 있는 일은 무척 드물기 때문이다.
대체로 하콘의 무용 공연은 즉흥성을 기반으로 했다. 즉흥 연주에 맞춰 즉흥 무용을 선보이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하콘을 만든 장본인인 박창수 선생님이 즉흥 음악을 연주하는 데서 비롯된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며 그 흐름에 조금씩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2016년 하콘의 첫 현대무용단 공연
2016년에 열린 제503회 하우스콘서트 설명 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하우스콘서트 역사상 처음으로, 현대무용단이 무대에 오릅니다.”
그 주인공은 안무가 김재덕이 이끄는 ‘모던테이블’이었다. 모던테이블과의 인연은 김재덕 안무가가 하우스콘서트에서의 무대를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화려한 조명도, 댄스 플로어도 없는 단출한 공간에서 열린 공연은 무용수들의 땀방울과 들숨, 날숨까지 고스란히 전해졌다. 관객들은 그 숨소리 하나까지 함께 호흡하며, 하우스콘서트에서 만나는 무용 공연만의 친밀함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변화의 시작은 늘 그렇듯 우연히 다가오고, 그렇게 또 새로운 길을 만든다. 하콘의 무용 공연도 그 맥락을 같이 했다. 즉흥이 중심이던 무대는 모던테이블과의 협업 이후, 만들어진 안무와 무용수들의 움직임으로 확장되었다. 현대 한국무용 단체인 ‘댄스컴퍼니 태’의 창단 공연(2021), 줄라이 페스티벌에서 바르톡의 발레음악 <허수아비 왕자>를 피아노 연주와 춤으로 재구성한 무대(2022)가 그 연장선에 있었다. 동시에 부토 무용수 등과 즉흥 작업도 이어지며 하콘과 무용의 만남은 어느새 하우스콘서트가 선사할 수 있는 가장 특별한 순간들로 쌓여갔다.
하콘과 무브먼트의 새로운 챕터
2021년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춤곡으로 이루어진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진짜 춤과 연결하면 어떨까?”
당시 유튜브 생중계를 진행하며 바흐의 무반주 작품을 소개할 때마다 ‘춤곡’이라는 언급을 자주 했는데, 그것이 이런저런 상상으로 이어진 것이다. 실제로 바흐 시대에 춤과 함께 올려진 적이 있을까? 단순히 춤곡의 리듬과 형식을 빌려온 것일까? 만약 오늘날 춤과 매칭한다면 어떤 모습일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공상 끝에, 이것이야말로 하콘의 무용 작업과 결을 같이하는 일이라는 생각에 닿았다. 그렇게 시작된 프로젝트가 <바흐×무브먼트>였다.
<바흐×무브먼트>는 2022년부터 2024년까지 3년에 걸쳐 진행됐다. 2022년은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전곡을, 2023년은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 전곡을 연주했고, 각 곡마다 다른 안무가들이 작품을 완성했다.
무대가 된 서울 마포구의 문화지축기지 T1 파빌리온은 사방이 유리 벽으로 둘러싸여 자연을 배경으로 한 공간이었다. 확성하지 않아도 악기의 울림이 자연스럽게 공명하고, 시간에 따라 변하는 빛의 흐름을 느낄 수 있으며, 새소리까지 들려오는 곳. 무엇보다 하우스콘서트처럼 관객이 무용수의 표정과 호흡을 가까이에서 마주할 수 있다는 점에서 특별했다. 물론 무용수들에게는 움직임이 제한적이고, 냉난방 등 무대 안팎으로 사소한 문제도 있었지만, 지금까지 하우스콘서트가 이어온 춤 작업을 적극적으로 드러낸 의미 있는 시도였다. 또한 서로 만나기 어려웠던 두 영역인 클래식 음악과 무용 사이에서 다리 역할을 했던 중요한 작업이기도 했다.
공연이 끝난 후 연주자 중 한 명은 이렇게 말했다. “첼리스트라면 누구나 한 번쯤 꿈꿔봤을 프로젝트를 하우스콘서트 덕분에 해볼 수 있어 감사했다”. 그 말은 하우스콘서트가 특정 공간에 국한되지 않은, 폭넓은 의미로서의 ‘살롱’이라는 것을 다시금 확인시켜 주었다. 그리고 2024년 <바흐×무브먼트>는 앞선 두 해의 프로젝트를 공연장으로 옮겨와 앙코르 무대로 쉼표를 찍었다.
공연장으로 옮겨 조명과 이머시브 사운드 등을 결합했던 2024년 앙코르 공연. 좀 더 큰 장소로 옮겨왔지만, 관객과 아티스트의 거래를 좁힌다는 고유의 컨셉트는 유지했다.
무브먼트의 다음 페이지
마침표가 아닌 쉼표라고 표현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2025년부터는 <바흐×무브먼트>가 지역 공연으로 이어지고 있고, 동시에 새로운 프로젝트인 <피아노×무브먼트>도 준비되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작품을 가지고, 새로운 시도를 멈추지 않는 일. 그것이 어떤 모습일지는 길모퉁이를 돌아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모든 여정이 그동안 하우스콘서트가 이어 온 ‘긴 호흡’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무브먼트의 다음 페이지는 아직 쓰이지 않았다. 그러나 하우스콘서트가 늘 그래왔듯 그 페이지는 새로운 만남과 시도로 채워질 것이다. 관객의 시선과 호흡이 더해질 때 비로소 우리의 여정은 의미를 갖게 된다. 다시 열리게 될 그 페이지를 부디 함께 넘겨주시기를 바란다. (<바흐×무브먼트> 영상 전체 보기)
강선애 더하우스콘서트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