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정부가 부동산 정책의 초점을 주택공급 확대에 맞추자 진보 진영에서 보유세 등 증세 요구가 쏟아지고 있다. 다만 시장에선 집값 상승세가 서울을 넘어 수도권으로 확산한 상황에서 수요억제책보다는 일관적인 공급 확대 정책 기조가 바람직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진보 경제학계 "집값 폭등 전조…세금 중과가 유일한 방법"
이준구 서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는 지난 14일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린 글을 통해 "머지않은 장래에 집값이 미친 듯이 뛰어오르는 참사가 벌어질 수 있다"고 이재명 정부에 경고를 보냈다. 미시경제학과 재정학 분야의 대가인 이 교수는 대표적인 진보 경제학자로 꼽힌다.
이 명예교수는 "심상치 않은 집값 폭등의 전조에 직면하고 있다"며 "지금 주택시장에 부는 가격 상승의 바람을 초기에 잠재우지 못하면 집값 폭등은 필연적 결과가 된다"고 우려했다.
그는 "주거 안정 없이는 서민의 삶이 결코 안정될 수 없다"며 "서민들이 내 집 마련의 꿈을 꿀 수 있게 만들려면, 자신이 살지도 않는 집을 몇 채씩 끌어안고 있는 사람들에게 부득불 세금을 중과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후보 시절 집값 안정을 위해 세금을 중과하지 않겠다는 뜻을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다. 그는 지난달 서울 강남권 유세에서 "앞으로 민주당 부동산 정책은 세금으로 수요를 억압해 가격을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공급을 늘려 적정 가격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가겠다"고 약속했다.
2022년 제20대 대선 당시 주장했던 국토보유세 신설과 주택보유세 강화에 대해서도 이 대통령은 "책임감이 커져서 생각이 바뀐 면이 있다"며 "부동산 세금은 손댈 때마다 문제가 돼 가급적 손대지 않아야 한다"고 입장을 선회했다.
지난달 경제 유튜브 연합 토크쇼에서는 "주거 문제에 대해 생각을 많이 바꿨다"며 "집은 주거용이지 투자나 투기용이 아니어야 한다고 이야기했는데, 이념적으로 맞지만, 불가능하더라"라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투자 수단으로 부동산 시장에 접근하는 것을 막을 길이 없다"며 "억지로 하려다 부작용이 발생했다. 집 사겠다는 사람들을 말리거나 세금 때려서 억누르지 말자"고 강조했다.
대신 집값을 안정할 방법으로 공급 확대를 꼽았다. 이 대통령은 "충분한 주거를 공급해 줘야 한다"며 "시장은 놔두는 대신 그 시장에 관여할 수 없거나 관심이 없으면서도 살만한 집을 구해야 하겠다는 데 충분히 집을 공급해주자"고 했다. 공공분양과 공공임대 물량을 통해 주택 공급을 확대하겠다는 취지다.
이 대통령 "민주당 집권하면 집값 오른다고…수요 억제 말아야"
다만 이를 두고 진보 진영에서는 '우클릭'이라는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이 명예교수는 이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이제 사람들은 부동산 투기에 팔을 걷어붙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세금을 중과하거나 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라는 말을 여러 번 반복했다. 정부가 부동산 투기를 방임한다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또 "이재명 후보는 공연히 쓸데없는 발언을 해서 사람들에게 잘못된 시그널을 줬다"며 "유일한 방법은 세금 중과"라고 거듭 강조했다. 공급 확대 정책에 대해서도 "집값 안정 효과를 내려면 아주 긴 시간이 흘러야 한다"고 선을 그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도 이 대통령의 부동산 정책을 두고 "토지공개념 강화 등이 제외되고 개발과 민간시장 확대 중심"이라며 "정책 방향이 '우클릭' 된 것으로 보인다"고 비판했다.
경실련 토지주택위원장을 역임한 전강수 대구 가톨릭대 명예교수 또한 최근 한 칼럼을 통해 "부동산 정책에 대한 이재명 대통령의 인식이 우려된다"며 "수요를 억압하는 가격관리 정책을 쓰지 않겠다는 것은 투기를 방치하겠다는 뜻"이라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대한민국은 부동산 보유세가 너무 낮아 언제라도 투기가 발발할 수 있는 환경"이라며 "장기적으로 이러한 환경을 개선하는 것이 새 정부의 책무"라고 주장했다.
다만 시장에서는 이러한 지적을 두고 냉소적인 반응이 나온다. 한 누리꾼은 "토지거래허가제로 실거주 수요만 허용되는 강남 3구(강남·서초·송파구) 집값이 오르는 걸 보고도 투기 소리가 나오느냐"고 지적했고 다른 누리꾼도 "문재인 정부 때 온갖 규제를 가져왔지만, 집값이 안정되었느냐"고 반박했다.
"급하다고 지름길만 찾아선 부작용…이미 경험" 지적도
전문가들은 꾸준한 공급 확대 정책 기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양지영 신한프리미어 패스파인더 전문위원은 "주택을 꾸준히 공급한다는 신호를 주면 시장을 자극하는 유효 수요를 부작용 없이 대기 수요로 돌릴 수 있다"며 일관적인 공급 확대 정책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전문가도 "당장 급하다고 지름길(수요 억제책)만 찾다가 집값이 치솟은 경험을 이미 가지고 있지 않으냐"며 "느리더라도 바른길로 가야 한다"고 꼬집었다.
실제 시장 안정을 위해 종합부동산세와 재산세 강화, 임대차 3법 도입 등 규제를 택한 진보 정권에서는 서울 집값이 크게 오르는 경향을 보였다. NH투자증권에 따르면 서울아파트 월간 매매가격지수는 김대중 정부에서 60%, 노무현 정부에서 34% 올랐고, 문재인 정부에서도 62% 치솟았다. 3% 하락한 이명박 정부나 10% 상승에 그친 박근혜 정부와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이와 관련해 이 대통령도 지난달 MBC 라디오 권순표의 뉴스하이킥과의 인터뷰에서 "민주당이 집권할 가능성이 크니까, 집값이 오를 거니까 집을 사자 그런다고 한다"며 "우리 진보 정권은 기본적으로 수요 억제 정책을 했다. 현상으로는 맞는 것 같다"고 수요 억제책의 한계에 공감했다.
이 대통령은 "수요를 억제하면 풍선효과가 생긴다. 이럴 때는 공급을 늘려야 한다"며 "수요 통제를 위해 세금을 활용하는 건 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따라 정부도 세금 카드를 제외한 부동산 대책을 검토하고 있다.
지난 12일 부동산시장 점검 회의에서는 "투기, 시장 교란 행위나 심리 불안으로 인한 가수요 등이 시장 안정을 저해하지 않도록 각 부처의 가용한 정책 수단을 총망라해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조정대상지역, 투기과열지구, 토지거래허가구역 추가 지정 등이 검토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오세성 한경닷컴 기자 ses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