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번역가 황석희, 뮤지컬 번역도
‘틱틱붐’, 가장 말맛살린 대본
연출진과 협업, 완성도 극대화
발음·음표까지 맞춘 정교함
AI 활용, 번역의 새로운 길
영화 ‘데드풀’ 번역으로 유명한 황석희는 요즘 영화보다 공연 번역으로 바쁘다. 그는 “그동안 제가 번역하는 영화 대 공연 비중이 8대 2였는데, 올해는 6대 4로 공연 비중이 많이 커졌다. 언제까지 이러한 추세가 이어질지는 모르겠다”고 말했다. 실제로 지난해 공연 티켓 판매액(1조2697억원)이 처음으로 영화계 총매출액(1조2615억원)을 앞지르기도 했다.
황석희는 이번에 7번째 뮤지컬로 신시컴퍼니의 ‘틱틱붐’을 번역했다. 앞서 뮤지컬에서는 ‘썸팅로튼’ ‘하데스타운’ ‘스쿨 오브 락’ ‘미세스 다웃파이어’ 등을 번역했다. 이번 ‘틱틱붐’은 그의 대본이 가장 많이 반영된, 말 맛을 그대로 살린 작품이다. 예를 들면 ‘따져서 따지고 따지고들면 따지는 널 보며 나 또한 따졌을테니까’라면서 주인공이 여자친구와 싸우거나 ‘진상들~ 집에서 쳐먹지. 왜 기어나와’라고 주인공이 식당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투덜투덜 거리는 대사가 있다.
그는 “뮤지컬계에서는 어찌보면 전 아직 ‘굴러들어온 돌’이다. 또 뮤지컬계도 전문번역가를 적극 기용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 과거에는 영어 잘하는 조연출이 번역하고 연출이 그 대사를 다듬었다고 한다”며 “하지만 이번 ‘틱틱붐’은 동갑인 이지영 연출가와 의견 많이 나누고 한 단어씩 다듬었다. 연출진과 한번 미팅할 때마다 5시간씩 얘기나눴는데 총 6번 만났다. 이번 ‘틱틱붐’은 제 색깔이 가장 많이 들어간 작품이라 애착이 간다”고 말했다.
뮤지컬과 영화 번역은 정반대라 할 정도로 차이가 크다. 황석희는 “영화 번역은 배우가 이미 내뱉은 대사에 자막을 입히는 것이고, 뮤지컬은 번역한 대본을 배우가 나중에 내뱉는 것으로 발화 방향이 정반대”라며 “영화 번역도 순간적인 자막이라는 물리적 제약이 있는데 뮤지컬 번역은 물리적 제약의 끝판왕”이라고 말했다. 이어 “뮤지컬 번역은 음표 하나하나 맞춰야 하고, 발음도 신경써야 한다”며 “뮤지컬 번역할 때는 무조건 노래부르면서 번역한다. 이후 연출진과 함께 발음, 연음, 단어 순서를 신경쓰며 테크니컬하게 다듬어 나간다”고 말했다. 그는 “번역가는 늘 골방에서 혼자 작업하는데, 뮤지컬 번역은 연출진도 만나고, 배우들도 만나면서 색다른 재미가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자칭 ‘찐따’ 시절이 길어서 ‘틱틱붐’에 과몰입할 수 있었다. ‘틱틱톡’의 넘버를 해석하며 스스로 위로받았다고. 뮤지컬 ‘틱틱붐’은 예술에 대한 열정으로 불꽃처럼 살다가 요절한 조나단 라슨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고 있다. 조나단 라슨은 뮤지컬계 혁명을 불러온 뮤지컬 ‘렌트’의 작곡가로 ‘렌트’ 공연을 하루 앞두고 사망했다. 뮤지컬 ‘틱틱붐’은 1990년에 서른 살을 맞은 이 예술가의 메가 히트를 하기 전 방황하고 불안해하는 인생을 보여준다.
황석희는 “한국은 정장입고 회사로 출근하지 않으면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한다. 그러한 프리랜서 생활을 20년 가까이 하고 있다”며 “20대초반부터 30대초반까지 남의 성공을 시기질투를 많이 하고 초조했다. 조나단 라슨처럼 서른즈음 가시적인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을 많이 받았다”고 말했다.
현재 그는 번역할 때 AI(인공지능)를 잘 활용하고 있어 AI가 없던 시절로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는 “챗GPT 등 유료 AI프로그램 5개를 이용하고 있는데 전지전능한 조수를 옆에 두고 있는 기분”이라며 “사실 AI는 초벌 번역기로서도 아직 가치가 없고 오히려 ‘이 상황이 왜 미국인에게 웃긴 것인가’라고 질문하면 ‘이 대사가 1950년대에 유행했던 대사라서 그렇다’고 알려준다. AI가 아니었으면 그 답을 얻기 위해 몇날 며칠 검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황석희는 요즘 관객 수준이 높아서 힘들다고 토로했다. “특히 영화는 영어 대사가 바로 나오니 오역이 잘 걸린다. 뮤지컬은 잘 안 걸리는 줄 알았는데 수준 높은 관객들이 유튜브로 원곡을 찾아 듣고 오역을 찾아낸다”며 “영화든 공연이든 관객 수준이 높아서 점점 더 높은 번역 정확도가 요구된다. 최대한 원작에 충실하고, 오역을 최소화하려고 노력할 뿐”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