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회 현장 찾고 글 쓰고 번역 등 작업
노동-퀴어-생태 등 다양한 문제 다뤄
해외 주요 문학상 후보 자주 올라
‘포스트 한강’ 불리며 기대감 높여
“2022년에는 무척 힘들었어요. 뭐를 쓰려고 할 때마다 ‘저주토끼’보다 잘 썼나, 그것하고 비슷한가가 계속 떠올라서 괴로웠거든요. 근데 1998년부터 글을 쓴 저는 20세기를 지나 21세기까지 100년 동안 ‘안 팔리는 작가’였잖아요(웃음). ‘내가 언제 팔려서 글 썼나’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어요.”10일(현지 시간) 소설집 ‘너의 유토피아’(래빗홀)로 한국인 최초로 세계 3대 공상과학(SF) 상 중 하나인 미국 ‘필립 K 딕 상’ 최종 후보에 오른 소설가 정보라(49)는 왠지 덤덤해 보였다. 21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에서 만나기 전, 4월 발표를 앞두고 기대가 크지 않을까 싶었지만 딱히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일각에선 그를 두고 ‘포스트 한강’이란 기대도 나오지만, 정 작가는 오히려 정색했다.
“그런 헛된 꿈은 꾸지 말아 주시면 좋겠어요. 세상에 한강은 한 명밖에 없어요.”
하지만 그는 이미 세계에서 주목받는 작가다. 소설집 ‘저주토끼’(래빗홀)로 2022년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 2023년 전미도서상 번역문학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른 적이 있다. 필립 K 딕(1928∼1982)은 영화 ‘블레이드 러너’, ‘마이너리티 리포트’ 원작자인 SF 대부. 그를 기린 상의 올해 후보작 6개 가운데 정 작가 작품이 유일한 번역서다. ‘저주토끼’를 번역한 안톤 허가 이번에도 번역을 맡았다. 호주판 ‘너의 유토피아’ 발행인인 마리카 웹 풀먼은 “현대 세계 문학장에서 가장 매력적인 목소리를 내는 작가 중 한 명”이라며 “날카롭게 비판하지만 유머 감각과 공감 능력을 발휘한다”고 평가했다.실제로 정 작가는 노동과 여성, 퀴어, 생태 등 다양한 문제에 꾸준히 목소리를 내는 활동가이기도 하다. 직접 보고 겪은 현실의 고통에 발붙인 작품을 쓴다. “뭘 알아야 기승전결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최종 후보에 오른 뒤 관심이 집중됐지만 집회 참가와 집필, 번역은 여전히 변함없는 일상이다. 경북 포항에 사는 작가는 최근에도 여러 시국 집회에 참여하며 활발하게 움직였다. 그의 검은 배낭엔 휴대용 깔개와 마스크, 핫팩 등 ‘집회 필수품’이 가득하다.
소설집 ‘너의 유토피아’의 첫 수록작인 ‘영생불사연구소’는 조직 생활의 ‘웃픈’ 현실을 그린 작품이다. 2010년경 연세대 노어노문학과에서 시간강사를 할 당시를 배경으로 썼다. 정 작가는 “연세대 노문학과 20주년 당시 일을 65% 정도 그대로 쓴 것”이라며 “외주 디자이너가 새벽 3시에 빨간 눈으로 ‘설마 모든 일이 이런 식으로 진행되는 건 아니죠’라고 물었고 그때 소설에 써야겠다 생각했다”고 떠올렸다.
수록작 중 작가가 가장 맘에 들어 하는 작품은 ‘여행의 끝’이라고 한다. ‘식인병’이 창궐한 세계를 그렸는데 감염자가 누군가를 먹으려고 하기 전까지는 감염 여부를 알 수 없다. 작가는 “딱히 비유는 아니다”라며 “겉보기에 멀쩡해 보이지만 가까이 가면 굉장히 불쾌하고 이상한 짓을 하는 사람이 많다고 느끼기 때문”이라고 했다.
차기작도 준비 중이다. 아이들이 공동으로 성장하는 집을 배경으로 한다. 부모가 있든 없든, 부유하든 가난하든 개인의 운명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세계다. 유토피아 같은 곳이냐고 묻자 “그 안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는 답이 돌아왔다.“유토피아 소설은 재미없어요. 제가 유토피아를 믿지 않거든요.”
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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