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기업을 향해] ㈜수일개발
60여 개국 누빈 ‘K-의료기기’… 이제 AI 인공췌장으로
FDA-CE-NMPA 모두 통과… 세계가 먼저 알아본 기술
‘야간 저혈당 차단’ 기술 허가 받아… 차세대 인슐린 공급 시스템도 선봬
문제는 숫자가 아니라 ‘어떻게 극복하느냐’다. 하루에도 몇 번씩 주사를 맞으며 합병증의 두려움을 안고 사는 환자에게 치료 방식은 곧 삶의 질을 가른다. 그래서 세계 당뇨 치료의 무게중심은 먹는 약이나 정해진 양을 주사하는 방식에서 몸의 췌장처럼 인슐린을 생리적으로 공급하는 방식으로 빠르게 옮겨가는 중이다.
미국당뇨병학회(ADA)가 제2형 당뇨병 환자에게도 인슐린펌프 사용을 공식 권고하기 시작했고 영국 케임브리지대 연구진이 임상으로 효과를 검증하면서 세계 인슐린펌프 시장은 본격적으로 열리고 있다. 학계는 2050년이면 국내 당뇨 인구가 지금의 두 배에 이를 수 있다고 경고한다.
여기에 인공지능(AI)까지 더해져 당뇨 치료는 전혀 새로운 시대로 진입했다. 이 거대한 흐름의 한복판에 무려 47년 전 세계 최초로 휴대용 인슐린펌프를 상용화한 한국 기업이 서 있다. 건국대 의과대학 최수봉 명예교수가 설립한 ㈜수일개발이다.“사업이 아니라 환자”… 흔들리지 않은 한 길
1979년 최 교수가 세계 최초로 휴대용 인슐린펌프를 상용화했을 때 국내 의학계의 시선은 싸늘했다. “의사가 무슨 기계를 만드느냐”는 냉대가 그를 따라다녔다. 연구비는 늘 부족했고 실패도 셀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를 붙든 것은 단 하나, 환자였다. 평생 혈당과 싸우며 당뇨합병증 공포에 불안해서 제대로 식사도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는 사람의 췌장에 가장 가까운 치료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다짐했다. 사업이 아니라 치료를 위해 시작한 연구였다.
지금도 그의 기억에는 잊히지 않는 얼굴들이 있다. 혈당이 안정돼 평생 미뤄뒀던 여행을 떠난 환자, 인슐린펌프를 단 뒤 비로소 친구들과 마음껏 뛰어놀게 된 아이. 그런 순간마다 그는 의료기기의 진짜 가치가 숫자가 아니라 한 사람의 삶을 바꾸는 데 있음을 거듭 확인했다고 말한다. 국내에서 외면받던 신개념 의료 기술을 먼저 알아본 곳은 해외였다. 미국 당뇨학계의 권위자 랄프 디프론조 텍사스대 의대 석좌교수가 그의 박사 논문을 높이 평가해 텍사스대로 초청했다. 진정한 가치가 있는 연구라면 국경을 넘어 인정받는다는 것을 그는 그때 배웠다고 했다.그는 스스로를 기업가가 아닌 의사이자 연구자로 여긴다. 환자의 문제를 발견하는 의사, 원인을 파고드는 연구자, 해결책을 더 많은 환자에게 전하는 기업가. 그에게 이 셋은 서로 다른 길이 아니라 환자라는 한 점에서 만나는 하나의 길이다. 주변에서 모두 불가능하다고 말할 때도 가족만은 그의 신념을 믿어줬고 흔들릴 때마다 그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그는 지금도 반세기 가까운 세월을 묵묵히 함께 견뎌준 아내 염윤희 대표에게 고마움을 잊지 않는다. ‘당뇨병 환자에게 기쁨을 선사한다’는 회사의 미션은 그에게 한낱 슬로건이 아니라 평생 좇아온 삶의 가치 그 자체다.
4분마다 췌장을 대신하다… 환자의 몸을 닮은 기계
인슐린펌프는 무엇이 다를까. 정상 췌장은 24시간 쉬지 않고 필요한 만큼 인슐린을 분비하지만 당뇨병 환자는 그 기능이 무너진 상태다. 경구약이 남은 췌장 기능에 기대고, 주사가 하루 한두 번 정해진 양을 넣는 데 그친다면 인슐린 펌프는 몸에 길이 0.5㎝ 정도의 짧은 바늘을 피하에 부착한 채 4분마다 인슐린을 자동으로 공급한다. 식사와 운동, 생활 패턴에 맞춰 양을 미세하게 조절하니 실제 췌장의 작동 방식에 가장 가깝다는 게 최 교수의 설명이다.
수일개발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체형이 작고 체중 감소가 두드러지는 한국형 당뇨병에 맞춰 별도의 펌프를 개발한 것이다. 비결은 책상이 아니라 진료실에 있었다. 환자가 무엇을 불편해하고, 무엇을 두려워하는지는 직접 만나야 보인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환자를 떠난 의료기기 개발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가 반세기 가까이 진료실을 지켜온 이유다.
기술은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지난 1월에는 저혈당 예측 기반 인슐린 주입 정지 기술(PLGS)을 적용한 ‘AnyDANA Plus’가 식약처 허가를 받았다. 환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야간 저혈당을 발생한 뒤가 아니라 발생하기 전에 차단하는 기술이다. 환자가 스스로 판단하던 시대에서 기기가 먼저 예측하고 보호하는 시대로 넘어가고 있다는 의미다. 어린이나 고령 환자처럼 야간 저혈당의 불안이 큰 이들에게는 삶의 질을 크게 끌어올리는 변화이자 완전 자동화 인공췌장으로 가는 중요한 이정표라고 그는 평가했다.
최 교수는 인슐린펌프를 ‘혁명’이라 부른다. 다만 몸에 지니고 생활하는 만큼 약간의 불편이 따른다는 점은 숨기지 않았다. 그 불편을 덜어주는 것 또한 자신들의 몫이라며 그는 더 얇고, 더 작고, 더 자동화된 제품을 위한 연구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고 했다. 또한 인슐린펌프 치료로 췌장 기능이 좋아져 건강을 되찾았다는 환자들의 후기가 효과를 증명한다고 덧붙였다.
특허가 아니라 ‘환자를 이해하는 깊이’
글로벌 대기업과의 경쟁에서 수일개발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무엇일까. 최 교수는 주저 없이 수십 년간 쌓아온 환자 데이터와 임상 경험을 꼽는다. 하드웨어만 만드는 회사가 아니라 의사가 직접 진료하고 그 결과를 토대로 연구해 다시 제품에 반영하는 선순환을 꾸준하게 이어왔다는 것이다. 그렇게 축적된 데이터와 임상 경험이야말로 누구도 쉽게 따라올 수 없는 독보적 비교우위라고 그는 자신한다.
그 깊이는 세계 학계가 먼저 알아본다. 최 교수는 최근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2026 아시아당뇨병학회에서 ‘제2형 당뇨병 환자에 있어서 인슐린펌프의 장기간 치료결과’를 발표해 주목받았고 그의 논문은 국제 학술지에도 잇따라 선정됐다. 인공췌장 연구의 권위자인 케임브리지대 로먼 호보르카 교수와의 학문적 교류도 오래됐다. 마침 ADA가 제2형 당뇨병 환자의 인슐린펌프 사용을 공식 권고하고 호보르카 교수팀이 2025년부터 그 효과를 임상으로 검증하면서 그가 수십 년 앞서 주장하고 실천해 온 길이 이제 세계 표준으로 인정받고 있다.
영향력은 국경을 넘는다. 그의 명성을 듣고 세계 곳곳의 환자들이 한국을 찾아 진료를 받고 자기 체질에 맞는 인슐린 용량과 사용법을 익혀 돌아간다. 그중에는 각국에서 영향력 있는 인사도 있어 본국 환자들에게도 같은 혜택을 주고 싶다며 직접 유통이나 대리점을 맡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한국에서 시작된 인슐린펌프가 환자에서 환자에게로, 세계로 번져가는 셈이다. 국적이나 규모가 아니라 실제 성능과 임상적 가치로 평가받는 냉정한 시장에서 결국 진정성을 알아보는 것은 시장이라는 게 그의 믿음이다.
60여 개국, 인공지능… 세계로 뻗는 K의료기기
수일개발의 인슐린펌프는 국내는 물론 중국, 유럽 등 60여 개국으로 수출되며 해외 매출 비중이 60%에 이른다. 미국 식품의약국(FDA)과 유럽 CE, 중국 NMPA 인증을 모두 획득했고 지난해 7월에는 유럽 최대 의료기기 유통사인 네덜란드 메디큐와 4년간 약 300억 원 규모의 공급계약을 맺었다. 최 교수는 이를 단순한 수출 확대가 아니라 ‘글로벌 표준’으로 진입하는 출발점이라 자평했다.
다음 무대는 인공지능이다. 프랑스 AI 기업 다이아벨루프와 손잡고 Dana-i 펌프에 인공지능 알고리즘을 결합한 차세대 자동 인슐린 공급 시스템을 선보였다. 구글에서 인공지능을 연구하던 최 교수의 아들도 최근 합류해 AI 기반의 글로벌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K뷰티에 이어 K의료가 세계의 주목을 받는 지금, 수일개발은 수십 년 임상 데이터에 AI라는 날개를 단 셈이다.
거대한 시장도 열리고 있다. 최근 인도 제약회사 경영진 세 명이 수출 계약을 위해 직접 회사를 찾았다. 전 세계 당뇨 환자의 4분의 1이 인도 사람인 만큼 그곳은 결코 놓칠 수 없는 시장이다. 회사는 폭발적으로 늘어날 글로벌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용인 공장 확장도 추진 중이다. 하드웨어만 만드는 회사가 아니라 데이터와 임상 경험으로 무장해 세계로 뻗어갈 글로벌 기업, 최 교수가 거듭 강조하는 수일개발의 좌표다.
“이제는 받은 사랑을 돌려드릴 차례”
성장의 한편에서 최 교수가 결코 놓지 않는 것이 있다. 환원이다. 이달 초 그는 취약계층 중증 당뇨 환자를 위한 무료 인슐린펌프 치료 지원을 확대한다고 밝혔다. 기업의 성공은 결코 혼자 이룬 것이 아니며 수많은 환자의 신뢰와 사회의 응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이제는 받은 사랑을 돌려드릴 차례입니다.”
그의 나눔은 뿌리가 깊다. 2010년 전쟁 중에 당뇨를 앓던 한 아프가니스탄 소년이 있었다. 제때 치료받지 못하면 생명을 장담하기 어려운 아이였다. 의사로서 외면할 수 없었던 그는 소년을 한국으로 초청해 치료를 시작했고 그 인연은 16년째 이어지고 있다. 사내 봉사단체 신우회와 인슐린펌프협회를 통한 나눔도 25년째다. 그는 “한 사람을 돕는 일이 세상을 다 바꾸지는 못해도 그 한 사람에게는 세상 전체가 바뀌는 일이라는 것을 그 소년이 증명했다”고 말한다.
이달 1일부터 1형 당뇨병 환자의 췌장장애가 법정 장애 유형으로 인정되기 시작한 데 대해 그는 “제도는 단지 시작일 뿐”이라고 짚었다. 사각지대를 먼저 발견하고 메우는 것이 기업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치료를 바라보는 인식도 바뀌어야 한다고 그는 강조했다.
요즘은 노부모를 둔 자녀가 신문이나 유튜브에서 인슐린펌프와 최수봉 교수의 정보를 접하고 부모에게 권하는 일이 부쩍 늘었다고 한다.
“인슐린펌프 값이 비싸다고 여길 수 있지만 한 번 구매하면 10년을 씁니다. 의료보험이 적용돼 소모품을 포함해도 하루 1000원, 한 달로 따지면 2만∼3만 원 수준입니다. 그 비용으로 부모님이 편하게 식사하고 합병증까지 예방할 수 있다면 결코 비싼 게 아닙니다.”
한편 최 교수는 환자들이 인슐린펌프를 착용하면 식사를 충분히 하는 데 도움이 되고 이를 통해 혈당 조절이 원활해져 합병증까지 예방할 수 있다는 점을 함께 강조했다.
“당뇨가 사라지는 그날까지 은퇴는 없습니다”
[인터뷰] 최수봉 교수 ㈜수일개발 창업주

동년배 의사 대부분이 일선에서 물러난 지금도 그는 진료실을 떠나지 않는다. 실력을 인정받아 EBS ‘명의’, KBS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등 유명 TV 프로그램에도 출연했다. 최근에는 유튜브 채널 ‘당뇨TV’를 열어 소통의 폭을 넓히고 있다. 그는 “진료실에서 만날 수 있는 환자는 한계가 있는 만큼 올바른 정보와 환자들의 이야기가 더 많은 이에게 닿기를 바라는 마음이 크다”고 말했다.
진료와 연구를 향한 의지는 단호하다. “당뇨가 사라지는 그날까지 은퇴는 없습니다.” 당뇨병 환자가 있는 한 자신의 연구도 진료도 끝나지 않는다는 그의 말에는 반세기 가까이 같은 자리를 지켜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단단함이 묻어났다.
그가 그리는 수일개발의 완성형은 매출이나 기업 가치가 아니다. 당뇨 환자가 가장 먼저 신뢰하는 기업, 당뇨 치료의 역사를 바꾼 기업으로 기억되는 것, 그것이 그의 바람이다. 휴대용 인슐린 펌프 상용화의 문을 연 시대를 지나 그가 바라보는 미래는 인공지능과 결합한 ‘완전 자동화 인공췌장’의 시대다.
그 청사진은 이미 그려지고 있다. 지난해 3월 최 교수는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일대에 약 14만 평(46만 ㎡) 규모의 부지를 사들였다. 서울과의 접근성과 앞으로의 발전 가능성을 함께 고려해 고른 자리라고 했다. 이곳에 AI 인공췌장 연구단지의 종합계획을 단계적으로 실현해 나가겠다는 구상이다.
‘세계적인 K의료기기의 메카로 만들겠다’는 목표 아래 당뇨 치료 특화 전문 종합병원과 인슐린 펌프 생산시설, 의료 전문 교육기관까지 한자리에 유치·건립해 ‘당뇨 치료 메디컬시티’를 체계적으로 세워가겠다는 것이다. 진료실에서 시작된 반세기가 이제는 도시 하나의 밑그림으로 번지고 있는 셈이다.
오랜 세월 쌓아온 임상 경험과 원천 기술이라는 무형의 자산을 어떻게 다음 세대로 잇느냐는 물음에 그는 “진정한 승계란 회사가 아니라 사명을 물려주는 것”이라고 답했다. ‘왜 이 일을 시작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다음 세대로 이어질 때 비로소 기업은 100년을 넘어 지속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당뇨와 싸우는 환자들을 향한 당부도 잊지 않았다. 당뇨병은 결코 희망을 포기해야 하는 병이 아니며 혼자 싸운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의사와 연구자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이 더 나은 삶을 위해 함께 노력하고 있다고 그는 힘주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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