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각의 사랑, 멕시코의 그림자…구아다니노의 '퀴어'

4 hours ago 1

바의 구석에 앉아 있는 남자는 연신 주위를 살핀다. 그의 바쁜 시선은 젊고 아름다운 청년들로만 향하는 듯하다. 마음에 드는 청년을 찾는 순간, 그는 망설임 없이 다가가서 데이트를 청한다. 오늘은 실패의 연속이다. 크게 낙심하지도, 희망적이지도 않은 마음으로 그는 거리로 나선다. 그리고 어두운 거리의 한 모퉁이에서 빛이 나는 청년이 나타난다. 하얀색 반팔 니트에 아이보리 치노를 입은 그는 아마도 멕시코 시티에서 가장 아름다운 청년이 아닐까. 청년은 남자와 눈이 마주치고는 엷은 미소를 짓는다. 남자의 심장이 요동을 친다.

영화 <퀴어> 스틸컷 / 사진출처. 왓챠피디아

영화 <퀴어> 스틸컷 / 사진출처. 왓챠피디아

곧 개봉을 앞둔 작품, <퀴어> (루카 구아다니노, 2024)는 윌리엄 버로우의 1985년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스크린에 올라오는 영화 제목도 <퀴어>가 아닌 <윌리엄 버로우의 퀴어>이다. 영화 제목에 원작 작가의 이름을 넣은 것은 그만큼 그의 존재가 이 영화의 정체성에 있어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윌리엄 버로우는 알란 긴즈버그, 잭 케루왁을 포함한 1950년대 비트 제너레이션을 대표하는 작가다. 그의 단편 소설 <퀴어>는 다른 비트 작가들이 그랬듯, 마약으로 인한 환각 상태에서 쓴 환영과 이미지들이 가득하다. 동시에 영화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사건은 버로우의 자전적인 이야기에 기반한다.

영화는 1950년대 배경의 멕시코 시티에서 사는 미국인 작가, 윌리엄 리(다니엘 크레이그; 윌리엄 리는 윌리엄 버로우의 필명이기도 하다)의 특별하지 않은 밤으로 시작된다. 그는 늘 가는 게이 바, ‘쉽 아호이’에서 술과 아편에 잔뜩 취한 채 잠자리 상대를 찾는다. 리의 타겟은 젊고 아름다운 청년이다. 성공보다는 실패가 더 많아지는 요즘이지만 그는 꾸준히도 사냥에 나선다. 그렇게 한참을 헤매던 그에게 마치 진흙 속의 원석 같은 광채를 내는 청년, 유진(드류 스타키)이 나타난다. 파도 같은 금발머리에 매끈한 피부를 거진 유진은 리의 간절한 구애를 뿌리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는 리로부터 거리를 두며 여자친구로 보이는 다른 이와의 관계 역시 유지해 나간다. 리는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는 유진에게 더 안달하다가 에콰도르로 여행을 가자고 제안한다. 리가 심취해 있는 텔레파시를 경험하게 해준다는 식물, ‘야헤’를 찾으러 가기 위해서다.

영화 <퀴어> 스틸컷 / 사진출처. 왓챠피디아

영화 <퀴어> 스틸컷 / 사진출처. 왓챠피디아

둘은 그렇게 남미의 깊은 정글로 향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들은 마침내 신비의 식물인 야헤를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이 경험한 것은 아편이 주는 안락한 환각을 넘어 생과 사, 그리고 육체와 정신이 완전히 분리되는 공포스럽고도 경이로운 트랜스의 상태다. 자신이 겪은 것에 공포를 느낀 유진은 바로 정글을 떠나버리고 리 역시 그를 뒤따른다. 그러나 그들은 정글 한 가운데서 서로를 잃게 되고 리 만이 2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후, 멕시코 시티로 돌아온다.

<퀴어>는 클래식 할리우드 영화의 고전적인 비쥬얼, 즉 색채와 공간 그리고 이미지를 그대로 재현한다. 영화는 로케이션보다 세트에서 (그리고 세트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프레임) 대부분 촬영되었고 아파트 창문 뒤로 보이는 배경이나 자동차 바깥의 풍경도 모두 프로젝트를 쓰거나 미니어처 빌딩을 활용하는 등 전통적인 영화적 기법을 사용했다. 따라서 오프닝부터 배경으로 등장하는 멕시코 시티의 이국적인 전경 (오손 웰스의 <악마의 손길>을 연상하게 한다), 그리고 주인공들이 거니는 거리와 선술집 등은 이 영화를 2020년대의 영화가 아닌 40년대에 만들어진 할리우드 느와르 영화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한다.

영화 <퀴어> 스틸컷 / 사진출처. 왓챠피디아

영화 <퀴어> 스틸컷 / 사진출처. 왓챠피디아

영화의 초반은 이토록 고전적인 공기를 담아 이국에서 만난 두 남자의 로맨스를 그린다. 그러나 이들이 남미로 떠나면서 영화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마치 잭 케루왁의 『길 위에서』가 그러하듯, 사이키델릭하면서도 염세적인 에너지가 가득한 꿈의 여정으로 탈바꿈한다. 그토록 꿈꾸던 ‘야헤’를 달여 마신 이들은 심장을 토해내거나 서로의 육체를 관통하는 등의 환각과 환상의 극단을 경험하게 된다. 리의 이러한 경험은 그가 멕시코 시티로 돌아와서도, 그리고 죽는 순간까지 머리와 육체를 떠나지 않고 결국 그를 잠식해 버린다. 그리고 그가 눈을 감는 날, 그의 영원한 연인, 유진은 젊은 상태 그대로의 모습으로 리 옆에서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한다. 유진은 정말로 존재했던 사람일까. 모든 것이 아편과 우울증이 만들어낸 리의 몽상은 아니었을까.

영화 <퀴어> 스틸컷 / 사진출처. 왓챠피디아

영화 <퀴어> 스틸컷 / 사진출처. 왓챠피디아

루카 구아다니노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2017)과는 다른 방식으로 두 남자의 관계를 그리면서도 전작이 그랬듯 메인 캐릭터의 심정적, 그리고 육체적 변화를 첨예하고도 독특한 방법으로 그려냈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엘리오가 사랑으로 일종의 전복을 경험한다면 <퀴어>의 리는 아편, 궁극적으로는 극강의 아편, 혹은 상상 속 아편이라고 할 수 있는 야헤라는 식물과 그 판타지가 만들어 낸 인물, 유진을 통해 트랜스 상태로 살게 된다. 후반을 예상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좀 당황스러운 영화의 방향이지만 어쩌면 초반의 서정적인 로맨스와 후반의 극단적인 판타지의 대비는 이러한 유진의 변화를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구성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역시 구아다니노의 영화적 ‘전복’은 이번 작품에서도 멈추지 않는다.

김효정 영화평론가•아르떼 객원기자

[영화 <퀴어> 메인 예고편]

Read Entire Artic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