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베를린 동시대 미술 현장에 대한 칼럼 기고를 시작하며 첫 번째 주제로 베를린 비엔날레를 다룬 바 있다. 당시 베를린 비엔날레를 수많은 국제 비엔날레 가운데 가장 뛰어난 동시대 미술 이벤트로 보지는 않지만, 자본과 미술시장의 영향력에 저항할 수 있는 ‘미술계의 실험실’로서 의미 있는 역할을 한다고 평가했다.
2025년 6월 13일부터 열리는 제13회 베를린 비엔날레 <도망자를 넘기며 (passing the fugitive on)>를 관람한 후, 그때의 평가가 여전히 유효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베를린 비엔날레는 보다 자유로운 정치적ˑ예술적 발언을 하며 자본과 시장의 논리에 저항하는 미술의 보루로서의 역할을 다시금 증명하고 있었다.
이번 비엔날레는 전 세계 다양한 지역 출신의 60명이 넘는 작가가 참여해 170점 이상의 작품을 선보인다. 전시는 베를린 비엔날레의 중심지인 KW 현대미술관을 비롯해 함부르거 반호프 현대미술관, 공연예술을 위한 조피엔젤레(Sophiensaele) 극장, 그리고 과거 법원이었던 장소 등 총 4곳에서 펼쳐진다.
인도 뭄바이 출생이자 현재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거주하며 활동 중인 큐레이터 자샤 콜라(Zasha Colah)가 기획을 맡은 이번 비엔날레는 전시 제목을 통해 “부당한 시스템 내에서 ‘합법’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에 맞서 예술이 스스로의 규칙을 정의하고, 박해와 군사화 상황에서도 메세지를 전달하며 자율성을 주장하는 능력”을 강조한다. 이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행동할 것을 촉구하는 지침이며, 관객으로 하여금 함께 ‘도망자’가 되어 작품의 메세지를 입에서 입으로 전파하며 실체화하는 역할을 수행하길 요청한다.
이 같은 도피성 혹은 불법성을 전시의 중심 주제로 삼게 된 배경에는 큐레이터 자샤 콜라의 개인사가 크게 작용했다. 그는 자신의 출신지인 인도와 주변국 미얀마의 현실이 점점 더 억압적이고 제한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으며, 주변의 많은 친구들이 투옥된 상황에서 ‘도피’는 생존을 위한 본능이라고 말한다. 또한 유럽 내에서 강화되는 반이민 정서와 우익화의 흐름 역시 이번 비엔날레의 맥락과 무관하지 않다고 덧붙였다.
비엔날레들과는 달리 <도망자를 넘기며>는 참여 작가 명단을 사전에 공개하지 않는 전략을 취하였다. 이는 관객이 작가의 명성이나 배경에 좌우되지 않고 작품 자체의 ‘판독 불가능성’에 집중하도록 유도하는 자샤 콜라의 큐레토리얼 전략이다. 그는 일종의 ‘문맹성’에서 출발하는 새로운 예술에 대한 경험이라고 본다.
참여 작가 명단은 발표하지 않았지만, 비엔날레가 열리는 장소는 사전에 발표되었다. 그중 미술관이 아닌 두 장소가 특히 주목된다. 조피엔젤레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어 왔으며, 공산주의와의 연관성을 이유로 폐쇄된 이력, 강제 노동 수용소로서의 과거가 있는 장소로서 현재는 공연예술 극장으로 활용되는 공간이다. 또 다른 전시장인 구 법원 건물은 ‘도피’라는 개념에 내포된 불법성을 환기시키며 합법의 정의에 질문을 던지고 예술은 스스로의 규칙을 새로이 정립한다는 메세지를 재현하는 장소로 역할을 한다.
일례로 조피엔젤레에서는 퍼포머티브한 사운드, 비디오 설치 작업들이 주를 이루며 전시 공간의 역사적 맥락과 긴밀하게 조응하였다. 아몰 파틸(Amol K Patil)은 회화, 오브제, 영상 작업 등을 연극적으로 구성한 설치작 <타오르는 연설 (Burning Speeches)>(2025)에서 자신의 개인적 경험과 역사를 과거 베를린 수공업자 협회 본부로도 사용되었던 조피엔젤레의 공간성과 연결지었다. 노동조합에 속했던 아버지와 카스트 제도에 맞선 저항의 시를 썼던 할아버지의 삶, 그리고 작가가 성장한 뭄바이의 BDD 촐스(노동자용 사회주택)에서의 집단적 삶의 경험을 예술로 소환했다. 파틸은 이를 통해 계급과 불평등, 집단 저항의 역사를 재현하며 조피엔젤레라는 공간에 개인적 기억과 식민·사회적 맥락을 중첩시키고 억눌린 목소리를 예술적으로 드러낸다.
한편, 구 법원 건물에서 지몬 박스무트(Simon Wachsmuth)의 <높은 하늘로부터 (From Heaven High)>(2025)가 주목할 만하다. 이 작품은 1920년 다다이스트 존 하트필드(John Heartfield)와 루돌프 슐리히터(Rudolf Schlichter)가 돼지 얼굴을 한 장교 마네킹이 등장하는 <프로이센의 대천사 (Prussian Archangel)>로 인해 국방군 모욕 혐의로 기소된 사건에서 착안한 비디오이다. 박스무트는 당시 조형물에 붙은 풍자적 문구 – “이 작품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템펠호퍼 비행장에서 완전 군장을 착용하고 하루 12시간 야전 행군을 해야 한다.” – 를 따르며 역사적 서사가 어떻게 재구성될 수 있는지 묻는다. 상징의 불안정성과 서사의 반복을 비판적으로 탐구하는 이 작품은 베를린 구 법원 건물이라는 장소성과 맞물려 권위와 재현, 저항의 의미를 다시금 성찰하게 한다.
이 외에도 전시는 관객과 작품 간의 공모를 유도하기 위해 신체성과 구술성에 기반한 다양한 전파 가능성을 탐색하는 미술작품을 전면에 내세우고, 연극 무대, 공연, 독서 모임, 재판 형식, 스탠드업 코미디 등 직접적으로 발언하는 방식의 작품을 주요하게 선보인다.
KW 현대미술관의 지하 공간에 설치된 밀라 파니치(Mila Panić)의 <거침없는 입 (Big Mouth)>(2025)은 스탠드업 코미디 공연을 위한 무대로 작가는 6일 밤 동안 매일 45분씩, 매회 베를린 현지 코미디언과 함께 공연을 펼친다. 그는 보스니아에서 성장해 독일로 이주한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전쟁과 그에 대한 공감, 희생자 등의 주제를 재치 있고 도발적인 유머로 풀어낸다. 파니치에게 스탠드업 코미디는 동시대 미술의 한 형태이자 분노와 절망 대신 유머를 통해 긍정의 순간을 창조하는 수단이다.
이처럼 이번 비엔날레는 비극적 현실을 단지 고통으로 수용하지 않고 유머의 전략을 통해 전환하려는 노력을 보인다. 큐레이터 자샤 콜라는 이를 ‘회복적 웃음 (restorative laughter)’이라 명명하며 블랙 유머 같은 예술적 제스처가 현실에 저항하는 중요한 수단임을 강조한다. 그는 유머가 고통 속에서도 생존을 가능케 하는 만병통치약일 뿐 아니라 ‘사유하는 신체’를 계속 작동할 수 있게 만드는 힘이라고 본다.
제13회 베를린 비엔날레 <도망자를 넘기며>는 단순한 시각 예술의 경험을 넘어, 동시대의 억압과 검열, 국가 권력에 맞서는 예술의 목소리를 생생히 드러낸다. 자본 중심의 미술 제도에 대한 비판, 도피와 생존의 감각, 그리고 유머를 통한 회복적 저항은 이 전시가 오늘날 예술의 역할을 어디까지 확장할 수 있는지를 묻는 근본적 질문이자 도전이다. 이번 비엔날레를 찾은 관객은 어쩌면 실험적 시도의 공모자가 되어 예술이 요청하는 ‘도망자’의 역할을 수행하며 함께 웃고 버티는 힘을 되찾는 경험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변현주 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