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헌법 개정 이후 개헌은 약방의 감초였다. 1990년 3당 합당 때 내각제 각서, 1997년 DJP(김대중·김종필)의 내각제, 노무현 전 대통령의 4년 연임,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국민 여망 담은 개헌’, 문재인 정부의 4년 중임제 등이 이어졌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도 지난 대선 때 개헌을 공약했다. 개헌이 번번이 무산된 것은 정국 타개용 등 정략이 중심이 됐기 때문이다.
다시 개헌 목소리가 분출하고 있다. 핵심은 제왕적 대통령 손보기다. 대통령 권한이 막강해 죽기 살기식 경쟁과 극단적 진영 갈등, 계엄과 같은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일리가 없지 않다. 4년 중임제, 의원내각제, 이원집정부제, 책임총리제 등이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개헌이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중임제는 재선을 위한 포퓰리즘과 ‘8년짜리 제왕’ 우려도 크다. 의원내각제가 제왕적 총리를 부르지 말란 법도 없다. 이원집정부제와 책임총리제도 안철수 의원 지적대로 ‘윤석열 대통령-이재명 총리’와 같은 극단의 갈등 구도를 만들 수 있다. 견제와 균형을 얼마나 조화시키느냐가 관건이다.
제도 변경만으론 안 되고, 후진적 정치 풍토부터 바꿀 필요도 있다. 제왕적 대통령이라지만, 과거 총재를 겸하던 시절에 비해 힘이 약화됐다. 대통령은 공천 등 당무에 개입할 수 없다. 그러나 계파를 내세워 암묵적으로 당을 지배하고 있고, 계파는 호가호위한다. 제도는 바뀌었지만, 권위주의적 시절 대통령과 당의 수직적인 명령 복종 문화가 여전하기 때문이다. 제도가 아무리 좋아도 지도자와 정치인의 함량과 품성이 따라가지 못하면 허사다. 헌법상 계엄 조건은 매우 엄격한데, 대통령이 사달을 낸 것만 봐도 그렇다.
입법부 과잉 권력도 문제다. 다수당이 입법권과 탄핵권이라는 막강한 힘으로 3권 분립을 해치는 것을 목도해왔다. 대통령은 법안 거부권 외에 견제할 수단이 없다. 다수당이 폭주하고, 조정력을 상실한 채 극한적 대립 문화가 뿌리 깊이 박혀 있는 한 의원내각제든 이원집정부제든 얼마나 잘 작동할까. 물과 고기 모두 썩었는데 물만 갈아선 안 된다. 스티븐 레비츠키가 민주주의를 잘 작동시키기 위해선 헌법 같은 제도를 바꾸는 것보다 관용과 자제가 더 중요하다고 한 이유다. 민주적 방식의 합의를 도출해내는 정치의 기본 기제(機制)가 제대로 돌아가고, 지도자의 리더십 등 소프트웨어를 선진화하는 것이 필요충분조건이란 얘기다.
이번에도 개헌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중구난방 개헌론 속에서 200명 이상의 국회의원이 동의할 단일안을 찾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조기 대선, 이재명 대표 당선’ 구도를 짜는 민주당은 탄핵이 우선이라고 한다. 각 정파의 정략부터 내려놓지 않고선 개헌은 성공할 수 없다.
개헌을 해도 걱정이 많다. 전문부터 그렇다.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이 2018년 제시한 개헌안 전문엔 5·18 광주민주화, 부마항쟁, 6·10항쟁, 촛불정신 등이 있다. 민주당 의원들은 제주 4·3, 동학농민운동, 기후 위기도 넣자고 한다. 헌법은 국가 통치의 기본원리다. 이 때문에 선진국 헌법엔 이런 정신을 축약하는 내용만 있고 역사적 사건은 없다. 보편성이 아닌 특정 진영의 입장을 담으려 한다면 그 결과는 분열이다.
권력구조 개편에만 관심이 쏠려 있는데, 정체성을 바로잡는 것도 중요하다. 기본 방향은 민주주의와 자유시장 경제여야 한다. 지금 헌법에는 시장경제와 사회주의적 요소가 섞여 있다. 경제력 남용 방지, 토지소유권 제한, 특정 집단 보호 등이 시시콜콜 담겨 있다. 민주당 개헌안에는 한술 더 떠 동일노동 동일임금, 노동3권 확대, 기업의 사회적 책임, 토지공개념 등이 들어 있고, 개헌을 한다면 이를 밀어붙일 것이다.
2018년 국회 헌법 개정안에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아예 빼버리고 노조 경영 참여 등을 넣었다. 국가 개입의 무한 확장이다. 규제는 늘어나고, 경제적 자유는 침해받을 수밖에 없다. 헌법은 한 번 고치면 시대 변화에 맞춰 다시 손대기 어렵다. 경직성 때문에 개별 법에 규정해도 될 것을 백화점식으로 늘어놓을 게 아니라 보편성과 최소한의 규율 원칙이 개헌의 밑바탕이 돼야 한다. 이런 기본이 지켜지지 않을 바엔 개헌은 안 하느니만 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