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쓸공소’는 ‘알아두면 쓸모 있는 공연 소식’의 줄임말입니다. 공연과 관련해 여러분이 그동안 알지 못했거나 잘못 알고 있는, 혹은 재밌는 소식과 정보를 전달합니다. <편집자 주>
한강 소설 ‘소년이 온다’를 원작으로 하는 연극 ‘휴먼 푸가’의 2019년 남산예술센터 초연 장면. (사진=남산예술센터) |
[이데일리 장병호 기자] 이제 1주일이 지났습니다. 지난 10일 밤 한강 작가가 한국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죠. 작가를 포함해 모두가 예상하지 못한 기쁜 소식이었기에 아직도 그 여운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수상 소식을 듣자마자 2019년과 2020년에 만난 한 편의 연극이 떠올랐습니다. 남산예술센터가 공연창작집단 뛰다와 함께 공동제작한 연극 ‘휴먼 푸가’입니다. 한강 작가가 2014년 발표한 소설 ‘소년이 온다’를 배요섭 연출이 무대로 옮긴, 한강 소설 중 국내에서 연극으로 제작된 유일한 작품입니다. 초연과 재연을 모두 관람했는데 공연을 보고 원작 소설을 읽었을 때처럼 한동안 먹먹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소설 속 문장을 체화한 배우들의 몸짓
한강 소설 ‘소년이 온다’를 원작으로 하는 연극 ‘휴먼 푸가’의 2019년 남산예술센터 초연 장면. (사진=남산예술센터) |
한강 작가의 소설은 읽기 쉽지 않습니다. 문장마다 작가가 오랜 시간 고민했을 감정이 깊이 배어 있기 때문입니다. 5·18 민주화운동을 다룬 ‘소년이 온다’도 그렇습니다. 한강 작가는 2017년 계간 ‘창작과 비평’ 178호에 실린 ‘그 말을 심장에 받아 적듯이’라는 글에서 ‘소년이 온다’에 대해 “이 책은 그분들의 것이다. 나는 다만 그 말들을 심장에 받아 적었을 뿐이다. 그 불가능한 방식으로 한 권의 책을 썼을 뿐이다”라고 쓰기도 했습니다.
연극 ‘휴먼 푸가’도 소설처럼 마냥 쉬운 작품은 아니었습니다. 연극은 소설의 이야기를 그대로 무대로 옮기지 않았습니다. 소설이 담고 있는 정서를 배우들의 몸짓으로 표현하는 일종의 퍼포먼스라고 할까요. 객석 위치도 독특했습니다. 무대 양옆에 의자를 배치한 대신 원래 있는 객석은 그대로 비워뒀죠. 텅 빈 객석은 천, 유리병, 종이 등 여러 오브제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막이 오르자마자 극장을 가득 채운 커다란 굉음이 지금도 기억납니다.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배우들은 ‘소년이 온다’ 속 문장을 각자만의 방식으로 읽으며 이를 몸짓으로 표현했습니다. 하얀 가루를 뒤집어쓴 배우가 의자를 높이 들어 벽을 치는가 하면, 한 배우는 카세트테이프를 바닥에서 높이 세웠다 무너뜨리기를 반복했죠. ‘소년이 온다’의 문장을 그대로 체화한 배우들의 몸짓, 그 움직임에 담긴 깊은 감정이 관객에게 고스란히 전해지는 작품이었습니다.
한강 작가가 참여했던 2020년 ‘관객과의 대화’
한강 소설 ‘소년이 온다’를 원작으로 하는 연극 ‘휴먼 푸가’의 2019년 남산예술센터 초연 장면. (사진=남산예술센터) |
2020년 11월 21일 남산예술센터 공연 이후 한강 작가가 직접 참여한 관객과의 대화를 취재했었습니다. 배요섭 연출과 배우 공병준, 김도완, 김재훈, 나경민, 박선희, 배소현, 최수진, 황혜란 등이 함께 한 자리였는데요. 한강 작가를 직접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소설만큼 투명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4년 전 관객과의 대화에서 한강 작가가 전한 이야기를 다시 정리해봤습니다. ‘소년이 온다’, 그리고 당시 한강 작가가 집필 중이던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에 대한 이야기도 담겨 있습니다.
“이 소설을 공연창작집단 뛰다와 배요섭 연출이 공연으로 만드는 것에 대해서는 우려가 없었어요. 소설에 나오는 동호는 얼굴이 없잖아요. 연극이나 영화에서 동호가 어떤 소년으로 캐스팅돼 고정되는 것이 좋을지 걱정되는 부분이 있었어요. 동호는 우리 마음속에 있는 우리 자신의 얼굴 같은 존재니까요. 오랜 친구인 배요섭 연출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며 이 소설이 극화되는 것이 두렵다고 했는데 배요섭 연출이 ‘그렇게 하지 않고 연극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고 했죠. 깊은 신뢰가 있어서 연극 제작 과정에 망설임은 없었어요.”
“공연을 세 번 봤는데요. 세 번 다 달랐어요. 볼 때마다 무언가가 계속 달라지는 연극 같아요. 제 존재가 뒤흔들리는 것 같은 감동을 받았고요. 글을 쓰는 사람은 이 글이 어떻게 나올지 알지 못해요. 2013년에 이 소설을 쓸 때는 소설이 나오면 기사 한 줄이라도 신문에 나올까, 이 소설을 사람들이 읽어줄까 싶었죠. 그 일들(1980년 5월 광주의 일들)이 다시 생명을 입고 우리 앞에 다시 돌아와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헛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1년 반 동안 썼던 문장들이에요. 그 문장들을 이렇게 목소리와 몸짓으로 본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신비롭고 믿을 수 없는 감동으로 다가와요.”
한강 소설 ‘소년이 온다’를 원작으로 하는 연극 ‘휴먼 푸가’의 2019년 남산예술센터 초연 장면. (사진=남산예술센터) |
“매년 5월 한 달 정도 이 연극을 공연하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어요. 소설은 돌아가신 분들의 영혼, 그때 부상을 당하고 육체를 잃은 이들, 또는 그 사건을 목격한 것만으로 영혼이 부서졌던 수많은 사람들의 영혼이 제 마음에 들어와서 쓴 것이죠. 저도 어떻게 이런 소설을 썼는지 가끔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1년 반 동안 사로잡히듯이 썼던 건데요. 그래서 연극을 볼 때마다 이분들이 겪었던 것이 우리와 이어져 있다는 게 아플 정도로 생생하게 느껴졌어요.”
“지금 쓰고 있는 소설(‘작별하지 않는다’)이 있어요. 초고를 다 써서 다듬고 있는데, 저는 워낙 오래 다듬기 때문에 언제 나올지는 모르겠어요. 그런데 이 소설은 ‘소년이 온다’에서 출발한 소설이거든요. ‘소년이 온다’를 쓰면서 제 몸에 새겨진 어떤 상태가 어떻게 나의 삶을 바꿔 놓았는지에 대해 쓰고 있어요. 사랑에 대한 이야기인데요. 남녀 간의 사랑이 아니라 지극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예요. 그런데 연습실에서 이 연극의 어떤 장면을 볼 때 눈물이 쏟아졌어요. 한 배우가 누워 있으면 다른 배우가 그의 몸을 펴주는데 그 장면이 굉장히 아팠어요. 제가 지금 쓰고 있는 소설의 한 장면인 것처럼 느껴지면서 마음을 쳤다고 할까요. 또 두 남자가 서로 껴안는 장면이 있는데요. 제가 소설 속에서 정말 껴안게 해주고 싶었던 쌍둥이 같은 운명의 사람들이 연극에서는 정말 껴안는 거죠. 몸으로 하는 무엇이 이렇게 마음을 울리는구나 하고 또 생각을 했어요.”
남산예술센터·공연창작집단 뛰다 마지막 작품
한강 소설 ‘소년이 온다’를 원작으로 하는 연극 ‘휴먼 푸가’의 2019년 남산예술센터 초연 장면. (사진=남산예술센터) |
푸가(fuga)는 독립된 멜로디가 반복되고 교차하면서 증폭되는 클래식음악의 한 형식입니다. ‘휴먼 푸가’에선 배우들이 각자만의 행동을 반복하며 광주의 아픔을 관객에 전했습니다. 배요섭 연출은 “처음 소설을 읽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푸가’였다”며 “1980년 광주를 겪은 사람들의 아픔은 푸가처럼 반복되고 변주되고 있다는 생각으로 제목을 정했다”고 설명했습니다.
‘휴먼 푸가’는 2019년 한국연극평론가협회 ‘올해의 연극 베스트3’로 선정되며 작품성도 인정받았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연극을 다시 만나기 힘들 것 같습니다. 2020년 11월에 공연한 ‘휴먼 푸가’는 남산예술센터의 마지막 작품이자 동시에 공연창작집단 뛰다의 마지막 작품이었기 때문입니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계기로 ‘소년이 온다’처럼 마음을 울린 연극이 있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기억하고 싶었습니다. ‘휴먼 푸가’가 꼭 아니더라도 한강 작가의 소설이 또 다른 연극으로 재탄생해 무대에 오르면 좋겠습니다.
*이 글은 2019년 11월 6일 작성한 기사 <한강 작가의 문장, 배우 몸짓이 되다…연극 ‘휴먼 푸가’>, 2020년 11월 24일 작성한 기사 <소설가 한강이 본 ‘휴먼 푸가’…“광주의 영혼, 무대 온 듯”>, 그리고 남산예술센터 디지털 아카이브를 참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