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에서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 등 '테크 거물'의 얼굴과 스타일을 앞세운 굿즈가 새로운 소비 트렌드로 떠오르고 있다. 테크 기업이 제품 경쟁을 넘어 창업자의 상징성과 팬덤을 자산으로 활용하는 흐름이 강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CEO 이미지가 기업 정체성
21일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지난달 열린 엔비디아 연례 콘퍼런스 GTC 2026 현장에선 젠슨 황 CEO의 캐릭터가 새겨진 초록색 스웨터가 178달러에 판매됐다. 샌프란시스코의 28세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하르딕 나하타는 이 스웨터를 입어봤지만 가격표를 보고 구매를 망설였다고 WSJ는 전했다. 그는 젠슨 황을 두고 “실리콘밸리의 테일러 스위프트 같다”고 말했다.
이 같은 현상은 엔비디아에 그치지 않는다. 팔란티어는 알렉스 카프 CEO 얼굴이 들어간 75달러짜리 티셔츠를 판매하고 있다. 방산기술업체 안두릴은 창업자 팔머 러키의 복장에서 영감을 얻은 꽃무늬 하와이안 셔츠를 79.99달러에 내놨다. 초기 물량이 모두 팔렸다. 전자상거래 사이트들에서는 젠슨 황이나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가 입은 것과 비슷하다고 홍보하는 가죽 재킷도 140달러 안팎부터 판매되고 있다.
과거 기술업계 CEO들은 전형적인 엔지니어형 이미지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최근에는 특유의 분위기를 앞세우는 사례가 늘고 있다. 팬들과 고객도 여기에 반응하고 있다. WSJ는 이런 변화가 CEO 개인의 이미지가 곧 기업 정체성으로 연결되는 구조를 보여준다고 짚었다.
전문가들은 이를 단순한 유행 이상으로 본다. 기술기업 CEO들과 함께 일한 경험이 많은 경영 컨설턴트 앨리사 콘은 "스타트업 창업자들이 대체로 대담하고 다소 기이한 성격을 공유하며, 팬들이 그 인물성과 연결되길 원한다"고 설명했다. 기업이 CEO 얼굴을 굿즈에 넣는 것은 회사 자체를 경영진의 페르소나와 결부시키려는 신호라는 것이다. 그는 이를 두고 “컬트를 구축하는 일”이라고 표현했다.
괴짜 CEO에서 '글로벌 거물'로 성장
실제 팔란티어는 이 같은 분위기를 가장 노골적으로 활용하는 기업으로 소개된다. 지난해 내놓은 한정판 티셔츠에는 짙은 선글라스를 쓴 카프 CEO와 함께 그가 즐겨 쓰는 문구인 ‘Dominate’가 담겼다. 이 제품은 몇 시간 만에 품절됐다고 WSJ는 전했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이를 두고 “팬보이 같다”는 반응도 나왔지만, 일부 지지자들은 “컬트라고 하니 차라리 받아들이자”며 맞섰다.
겉으로는 자기 풍자처럼 보이지만, 그 아래에는 건강한 자아 과시가 깔려 있다는 해석도 나온다. 루이지애나의 머천다이즈 컨설팅 업체 대표 니키 노턴은 "기술기업 CEO들이 본질적으로는 여전히 괴짜 엔지니어이고, 얼굴이 들어간 옷은 그런 점을 유머러스하게 드러내는 방식"이라고 말했다. 다만 AI 붐이 엔비디아를 세계 최대 기업으로 끌어올리면서 젠슨 황 같은 인물은 단순 경영자를 넘어 국가 정상들과 어울리는 ‘킹메이커’ 위상까지 얻게 됐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숫자와 상품 구성에서도 이런 변화가 읽힌다. 엔비디아 콘퍼런스에 참석한 한 브랜딩 회사 대표는 ‘젠슨 장난감’ 캐릭터가 들어간 스웨터를 구매했다며, 일상복으로 늘 입을 스타일은 아니지만 구매 자체가 즐거운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팔란티어 굿즈 사업 책임자는 카프 CEO를 과거 R&B나 힙합 아티스트, 마이클 조던과 코비 브라이언트 같은 운동선수에 비견했다. 기술기업 CEO를 문화 아이콘처럼 소비하는 시각이 상품 기획에 직접 반영된 셈이다.
메타의 마크 저커버그도 이 흐름을 확장한 사례로 거론된다. 그는 2024년 자사 행사 무대에서 ‘Aut Zuck Aut Nihil’이라고 적힌 검은 티셔츠를 입고 등장했다. 이는 ‘Aut Caesar Aut Nihil’를 비튼 표현으로, ‘모 아니면 도’ 식의 강한 자기 상징을 드러낸다. 이 셔츠는 메타나 디자이너 측이 공식 판매하지는 않지만, 아마존에서 유사 제품이 15.99달러에 올라와 있다고 WSJ는 전했다.
개인에 대한 과도한 의존은 경계
이번 현상은 실리콘밸리에서 기업 브랜드가 기술 혁신이나 제품 성능만으로 형성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투자자와 소비자, 직원들이 창업자 개인의 스타일과 서사, 권위를 함께 소비하는 구조가 강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AI와 방산, 플랫폼 기업처럼 산업 파급력이 큰 분야일수록 CEO 개인의 상징성은 더 빠르게 상품화될 가능성이 큰 것으로 평가된다.
다만 이런 흐름이 언제까지 유쾌한 팬덤으로 남을지는 불확실하다는 전망도 있다. CEO 개인에 대한 과도한 동일시는 기업의 성패를 특정 인물의 이미지에 과도하게 의존하게 만들 수 있어서다. WSJ는 "그런데도 현재 실리콘밸리에서는 기술기업 수장의 얼굴을 입는 일이 더 이상 조롱의 대상이 아니라, 소속감과 취향, 투자 심리를 동시에 드러내는 소비 방식으로 자리 잡고 있다"고 분석했다.
황정수 기자 hj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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