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의 첫 여성 주인공…‘모녀 서사’ 그렸지만 갈등 대면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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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호/무라카미 하루키·홍은주 옮김/376쪽·1만8500원·문학동네 무라카미 하루키(77)의 16번째 장편소설 ‘가호’는 ‘처음’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나왔다. 하루키가 처음으로 여성을 단독 주인공으로 세운 장편이고, 작가 스스로 그동안 거의 쓰지 않았던 가족 이야기에 “이제는 도전해도 좋을 때가 됐다”고 밝힌 작품이다. 일본에선 7월 출간 나흘 만에 30만 부를 찍었고, 한국어판은 해외 번역본 가운데 가장 먼저 나왔다. 기대가 큰 만큼 물음도 분명하다. 이 ‘처음’들은 이야기 안에서 제 몫을 해냈을까.스물여섯 살 그림책 작가 가호는 소개로 만난 남자에게서 “그쪽처럼 못생긴 상대는 처음”이라는 말을 듣는다. 이 무례한 첫 장면 이후 가호는 꿈에 나타난 개미핥기의 권유로 도쿄 외곽으로 이사한다. 개미핥기, 재규어, 흰개미 여왕으로 이어지는 기묘한 존재들을 지나고 나면, 이야기의 중심축은 어머니의 몸을 차지한 ‘흰개미 여왕’과 가호의 대결로 옮겨진다. 이 소설이 ‘모녀 서사’로 소개되는 이유다.그런데 이 모녀 서사에 정작 어머니가 없다. 소설 속 어머니는 언제부턴가 흰개미 여왕에 몸을 빼앗긴 상태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딸을 대하는 어머니의 낯선 모습은 그 안에 들어앉은 악귀 때문이라는 설정이다. 갈등의 주체 중 한 사람이 무언가에 ‘씐’ 상태라니. 이로써 어머니는 해명할 필요가 없어지고, 딸은 어머니를 이해할 필요가 없어진다. 딸을 억누르거나 상처 입힌 사람이 어머니 자신이어야, 딸은 그 어머니와 대면하고 관계를 다시 짤 수 있다. ‘가호’는 이 지점을 피해 간다.하루키의 세계는 은유로 움직이고, 흰개미 여왕을 죽이는 일이 곧 어머니와의 상징적 대면이라는 해석도 가능할 수 있다. 다만 은유 역시 현실의 관계에 무언가를 일으킬 때 의미를 가질 텐데, 여왕이 죽은 뒤에도 이들 모녀 사이엔 딱히 달라진 게 없어 보인다. 사실 이 모녀의 갈등은 두 사람이 부딪쳐 풀어낸 것이 아니라, 어머니에게서 여왕이 떨어져 나가면서 ‘저절로’ 해소된 것에 가깝다. 서로를 마주하는 법을 끝내 익히지 못한 모녀가 다음 갈등 앞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가호’의 미덕은 분명하다. 첫 문장부터 독자를 붙들고, ‘페이지 터너’라 할 법한 속도감을 마지막까지 유지한다. 가호가 겪는 기묘한 일들이 그녀가 그리는 그림책 속 이야기와 나란히 전개되는 극중극 구조도 단단하다.다만 이 소설이 스스로 내건 과제가 가족이었음을 생각하면 아쉬운 대목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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