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중에는 카페에 자주 들른다. 평소보다 더 자주, 못해도 하루에 세 군데는 들른다. 특히 혼자 여행할 땐 카페에서 책도 읽고 기록도 하며(물론 화장실도 쓰고) 남아도는 시간을 소비한다. 그렇다고 매번 카페에 갈 때마다 커피를 마실 순 없다. 카페인 과다로 잠을 이루지 못할 게 뻔하니까. 다행히 튀르키예엔 다양한 재료로 만든 독특한 전통 음료가 꽤 많으니 크게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자, 무엇부터 마셔볼까?
튀르키예의 여름은 얼음 동동 띄운 셰르베트(Şerbet)가 딱이다. 달콤새콤한 과일이나 향기로운 꽃잎 등에 물을 붓고 끓여 진하게 달인 후 꿀과 설탕을 듬뿍 넣어 보관해 두었다가 찬물과 얼음을 타서 마시는 음료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다면, 맞다. 우리나라에서도 집집마다 흔히 담가 즐기는 매실청과 유자청, 모과청과 아주 비슷하다. 튀르키예에선 딸기와 살구, 오디, 석류, 체리, 자두, 포도, 타마린드, 모과 등의 과일과 장미꽃, 제비꽃, 오렌지꽃 등의 꽃잎을 다양하게 사용한다. 여기에 시나몬과 정향, 감초 같은 향신료로 매력을 더하기도 한다.
무슬림은 종교 교리상 술을 마시지 않으니, 대신 진한 셰르베트 농축액을 만들어선 손님이 오면 시원하게 대접하는 전통이 있다. 처음 셰르베트를 고안한 건 500여 년 전 중동 지역 사람들인데, 곧 오스만제국(현재의 튀르키예)에 널리 퍼졌다. 그리고 다시 유럽으로 전파되었는데, 워낙 맛있으니 그럴 만하다. 그에 따라 음료의 이름도 아랍어 샤리바(شَرِبَ)에서 튀르키예어 셰르베트(Şerbet)로, 영어인 셔벗(Sherbet)과 프랑스어 소르베(Sorbet)로 변해갔다. 유럽에선 얼음을 띄우는 대신 아예 원액에 눈과 얼음을 섞어서 사각사각하게 만들어 먹는 방식이 인기였단다. 우리에게 친숙한 ‘샤베트’가 바로 이 거다. 괜히 반갑지 않을 수 없다.
광장이나 시장 등 사람이 모이는 곳에선 화려한 전통 의상 차림에 번쩍거리는 금속제 음료 통을 짊어진 셰르베트 아저씨를 만날 수 있다. 이런 분들은 보통 쌉쌀한 맛이 강한 까만색의 감초 셰르베트(Meyan Şerbeti)를 파는데, 그야말로 약장수처럼 큰 소리로 감초가 얼마나 맛있고 몸에도 좋은지 외친다.
그래도 최고는 역시 타마린드 열매로 만든 데미르힌디(Demirhindi) 셰르베트다. 새콤달콤한 맛도 맛이지만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옛날 옛적 한 술탄이 신나게 사냥하다 목이 말라 근처의 민가를 찾아갔단다. "뭐 시원한 것 좀 없냐"고 하니 집주인이 후다닥 데미르힌디 셰르베트를 큼직한 그릇 가득 담아 내왔고, 단숨에 들이켠 술탄이 그 맛에 감탄하며 음료 그릇에다 황금을 꽉 채워서 돌려주었다나. 아이고 부러워라. 우리 집에도 꼭 한 번 와주시면 좋겠다.
셰르베트가 여름 음료라면, 쌀쌀한 계절엔 보자(Boza)가 좋다. 곡물가루를 묽은 죽처럼 끓여서 발효시킨 거라 구수하고 걸쭉하고 살짝 새큼하다. 설탕이 꽤 들어있어 진하게 탄 미숫가루와 막걸리 생각도 난다. 주재료가 옥수수와 밀, 기장, 보리 등인 만큼 출출할 때 야금야금 떠먹으면 든든하다. 불가리아를 비롯해 발칸반도를 두루 여행하면서 흔히 마셨던 음료라 튀르키예에서 만나니 퍽 반가웠는데, 알고 보니 발칸반도와 코카서스 지역, 중앙아시아에서 두루 만든단다.
역사도 놀랍게 긴데, 무려 기원전 4천 년 메소포타미아 초기 농경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긴, 재료도 그렇고 만드는 법도 그렇고,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레 어디서든 생겨났을 법하다. 수확한 곡물을 빻아 가루 내고, 물과 불로 다양한 형태의 음식을 만들고, 먹고 남은 것은 날씨와 시간의 도움으로 발효되었을 테니까. 보자의 알코올 도수는 으레 1% 내외인데, 오스만제국 시절엔 날이 더워지면 발효가 과해져 알코올 도수도 확 높아지곤 해 술탄이 급히 보자 금지령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니 전통적으론 겨울철 음료였던 모양이다. 지금이야 냉장 시설 덕에 일년내내 안정적으로 보자를 즐기게 되었지만.
특히 튀르키예 북서부 에스키셰히르의 옥수수 보자(Mısır boza)는 굉장한데, 이스탄불에서 고속열차(YHT)로 2시간 30분 거리라 주말 여행지로 인기 있는 곳이다. 1925년에 문을 연 보자 전문점 카라케디 보자시시(Karakedi Bozacısı)에선 연노랑빛의 걸쭉하고 달콤한 보자에 향긋한 시나몬 파우더를 듬뿍 뿌려준다. 음료라기보다는 숟가락으로 떠먹는 디저트 같다. 가게 벽에는 단백질과 칼슘, 철분, 유산균이 듬뿍 들었다는 광고 포스터가 붙어있다. 우리나라 식당에도 ‘○○의 효능’ 문구를 붙여놓은 게 떠올라서 웃음이 절로 나온다.
앞서 카페인 걱정을 했지만, 튀르키예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음료를 거부할 순 없다. 차이(Çay), 즉 홍차다. 말 그대로 튀르키예 하면 차이다. 맛이야 우리가 다 아는 그 홍차 맛인데, 만드는 방법이 독특하다. 적은 양의 물에 찻잎을 듬뿍 넣어 약한 불에서 15분가량 뜸 들이듯 우려내어 쓰고 진한 추출액을 만든 후 특유의 자그마한 유리잔에 3분의 1 정도 붓는다. 거기에 뜨거운 물을 섞어 농도를 맞춰 마신다. 그래서 튀르키예의 찻주전자 차이단륵(Çaydanlık)은 2단 형태다. 윗단은 차 추출액을, 아랫단은 물을 끓인다. 심지어 전기 주전자마저 2단이다.
튀르키예에선 어딜 가든 차이를 권한다. 길을 걸을 때나 상점에 들어갈 때도 인사처럼 “차이?”라는 질문이 날아오고, 식사하고 나면 주문하지도 않은 차이를 서비스로 내어주곤 한다. 감사한 환대다.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이래저래 하루에 열댓 잔 이상은 마신단다. 당연히 마트 식품 매장엔 헛웃음이 나올 만큼 찻잎이 가득하고, 설탕 매대엔 각설탕이 쌓여있다. 요 작은 유리잔에 각설탕을 한두 개씩 꼭꼭 넣으니까. 튀르키예를 여행하다 보면 절로 차이에 익숙해지고, 꽤나 정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찻잔이 아무리 작다고 해도 주는 대로 다 마셨다간 밤을 꼴딱 새우게 될 텐데 어쩐다.
이렇게 된 거 커피까지 마셔보자. 차이만큼이나 또 유명한 게 투르크 카흐베시(Türk kahvesi), 즉 튀르키예 커피 아닌가. 무슬림은 하루 다섯 번 기도하는데, 첫 번째 기도 시간이 보통 새벽 네 시경이라 졸음을 쫓기 위해 커피콩을 씹어 먹거나 으깨서 빵에 발라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얼마나 썼을까, 말만 들어도 잠이 깨는 것 같다. 그러다 음료 형태로 발전하면서 여럿이 모여 대화를 나누며 커피를 마시는 문화도 생겨났단다. 튀르키예 사람들은 세계 최초의 카페가 이스탄불에 있었다는 것을 무척 자랑스럽게 여긴다. 오스만제국 시절인 1475년에 문을 열었다고.
전통적인 튀르키예 커피잔은 아주 작고 귀엽다. 차이 잔과 더불어 인기 있는 기념품이다. 커피를 주문하면 으레 물 한 잔을 함께 내주는데, 마지막에 요걸로 입을 헹구어 입안의 커피 찌꺼기를 청소한다. 아주 곱게 간 커피콩과 물을 주전자에 담아 천천히 끓인 후 가루를 거르지 않고 그대로 잔에 담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 몇 번은 원래 이런 건가 생각하며 가루까지 함께 마시면서 아작아작 씹어 삼켰는데, 알고 보니 마시기 전에 잠시 놓아두어 가라앉힌 다음 윗물만 조심스레 마시는 거란다. 이럴 수가.
이런 정보는 모두 튀르키예 커피 체험 수업에서 배운 것이다. 튀르키예엔 음식 만들기, 타일 그리기, 장식 조명 만들기 등 여행자를 위한 수업이 꽤 많다. 커피 수업에선 전통적인 도구로 커피콩을 갈고, 구리 주전자로 진한 커피를 만들어 달콤한 디저트와 함께 마시며 도란도란 튀르키예의 문화와 역사 이야기를 나눈다.
잔이 워낙 자그마해 금세 마셔버렸지만, 진짜는 이제부터다. 잔 바닥에 진흙처럼 가라앉은 찌꺼기로 점을 치는 것이다. 우선 잔 받침으로 잔을 덮은 후 재빨리 뒤집어 잠시 놔뒀다가, 찌꺼기가 받침에 다 흘러내렸겠다 싶으면 잔을 집어 들고 얼룩을 확인한다. 물고기 모양, 하트 모양, 기다란 선 모양 등에 각각의 의미가 있단다.
혼자 하기보단 둘 이상 모여 상대방의 얼룩을 해석해 주는 게 원칙인데, 오스만제국 시대 하렘의 여성들이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커피점에 그렇게들 몰두했다고 한다. 재미로 시작한 게 너무 과해지기도 해, 어떤 술탄은 잔 받침 사용 금지령까지 내렸다고 한다. “당신의 미래는… 오늘 저녁에 케밥을 먹겠군요!” 오늘 처음 만난 여행자들과 함께 강사의 설명을 듣고 서로의 얼룩을 해독하며 미래를 예측하며 깔깔 웃었다. 믿거나 말거나, 즐거우면 됐지.

11 hou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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