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도 미안해하지 않는 우정[고수리의 관계의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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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리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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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야!” 나를 불렀던 신기원의 목소리를 기억한다. 전학생인 내게 처음 말 걸어준 친구가 기원이었다. 나보다 머리 하나는 훌쩍 크고, 씩씩하고 털털한 기원이는 마치 영화 ‘써니’에 나오는 왕언니 ‘춘화’ 같은 친구였다. 어리숙하고 내성적인 나는 전학생 ‘나미’ 같은 친구였고. 아무튼 그날부터 우리는 같이 다녔다. 자습 시간에 몰래 땡땡이도 쳐보고, 카세트테이프에 노래를 녹음해 선물하고, 의기투합해서 연극 동아리를 만들기도 했다. 닮은 구석이라곤 특이한 이름뿐인 신기원과 고수리. 우린 달라도 너무 달랐지만, 고교 시절 내내 붙어 다녔다.

어른이 되어 가정을 이루고 마흔이 될 때까지 서로의 모든 처음을 지켜봐 주었다. 각자의 삶을 일구며 이따금 통화하고 드문드문 만났다. 나눌 만한 공통사도 달라졌지만, 만날 때마다 가물가물한 추억을 더듬으며 와하하 웃었다.

돌아보면 언제나 손을 내밀었던 건 기원이었다. 어려서부터 이사만 열댓 번, 어디에도 오래 마음 붙이지 못하고 떠돌며 지낸 탓인지 나는 어떤 관계든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보고 싶다고 친구를 떠올려도 살뜰하게 챙기지 못하는 스스로가 못마땅했다. 하지만 기원이는 다른 반으로 갈라지고도 매번 교실로 찾아와 나를 불러낼 때처럼, 스스럼없이 연락해 왔다. 내내 그게 미안했다.

기원이의 전화를 받았다. 마지막 통화 기록은 지난겨울, 어느덧 두 계절이나 지나 있었다.

“수리야, 밥은 먹었니. 어디 아픈 덴 없고. 하는 일은 어때.” 기원이는 엊그제 헤어진 친구처럼 안부를 물었다. 그러다가 툭, 엄마가 좀 아프셨노라고 얘기했다.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퍼뜩 정신이 들었다.

“괜찮아? 내가 먼저 챙겼어야 하는데. 이럴 땐 정말 중요한 걸 놓치고 사는 거 같아. 너한텐 맨날 미안해”라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기원이가 다정하게 나를 타일렀다. “수리야, 나한텐 하나도 미안해하지 마.” 그러곤 이런 말들을 건네주었다.

“정말 심각했으면 벌써 얘기했지. 우리 어른이잖아. 애들 키우고 부모님 부양하면서 밥벌이하느라 눈 깜빡하면 하루가 지나가잖아. 먹고사느라 정신없지. 다들 그렇게 살아. 누가 먼저인 게 뭐가 중요해. 그냥 생각나는 사람이 연락하는 거지. 그래도 우리 잘 살고 있어. 하루하루 열심히 사는 것만으로도 대견하다. 촌뜨기 전학생이 책 쓰는 작가님도 되고. 야, 너는 내 자랑이야.” 친구 사이에 오가는 마음. 그러니까 우정이라는 건, 잠시 나누기보다 오래 지키기가 훨씬 어렵다는 걸 깨닫는다. 다들 그렇게 산다 해도 먼저 손 내미는 마음은, 애쓰는 정성이라는 것도.

신기원을 만났다. 홀로 낯선 데로 뚝 떨어진 열일곱 살의 나. 가족이 깨지고 집도 사라져 이모네 더부살이하던 첫날에 네가 나를 불렀다. 그날부터 너는 내가 돌아가야 할 길을 알려주었지. 혼자 있지 말라고. 좋은 곳으로 가보자고 손을 내밀어 준 친구에게, 나는 미안하지 않다. 고맙기만 할 뿐. 너의 손을 맞잡으며 나는 하나도 미안해하지 않는 우정을 배웠다. 있잖아. 그런 네가 나에겐 자랑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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