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루스트 마들렌과 할머니의 만둣국...주름진 기억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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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하지 않으면 기억은 쉽게 흩어진다. ‘휘발성 기억의 저장고’라는 이름으로 독서 일상을 블로그에 남겨왔다. 기억을 그러모으는 시도는 시간을 거슬러 세워 두는 일과 다르지 않았다. 흐르는 시간을 멈추게 할 수는 없지만, 글로 쓰면 시간을 보존할 수 있다고 믿었다. 무용해 보이는 글쓰기에 부여한 나만의 의미였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읽고 쓴 기록은 휘발되지 않고 ‘기억의 저장고’에 남아 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쓴 마르셀 프루스트가 만약 나의 기억을 본다면 ‘의지적 기억’이라고 부를 것 같다. 어렴풋하게 남은 과거의 순간을 붙잡고 애써 기억하며 기록하는 순간, 기억은 이미 선택과 해석을 거친다. 완전히 되돌릴 수 없는 장면은 훼손된 그림처럼 비어 있는 채로 남아서 그 빈자리를 상상과 허구가 채운다. 같은 사건에 대해 서로의 기억이 다른 이유다. 프루스트에게 ‘의지적 기억’은 지성의 영역으로 더 이상 살아있는 과거가 아니었다. 단편적이고 편집된 과거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과거를 되살리려는 노력은 헛된 일이라고 그는 말한다.

사진 출처. unsplash

사진 출처. unsplash

반면 ‘비의지적 기억’은 감각을 통해 예고 없이 찾아온다. 어떤 의도나 계획 없이 현재를 덮치는 우연의 사건이다. 소설 초반에 나오는 유명한 장면을 보자. 어느 겨울날 집에 돌아온 화자가 추위에 몸을 움츠리자, 엄마는 그에게 조가비 모양의 짧고 통통한 마들렌 과자와 홍차를 권한다. 화자의 평소 습관대로라면 마시지 않겠지만 그날은 왠지 마음이 바뀌어 잔을 받는다. 마들렌을 적신 홍차 한 모금이 입천장에 닿자, 설명할 수 없는 변화가 몸 안에서 일어난다. 불투명한 미래 때문에 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마음이 순식간에 알 수 없는 기쁨으로 가득 차오른다.

그 순간 화자는 깨닫는다. 자신이 찾고 있던 진실은 저 멀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자기 안에 놓여 있었다는 사실을. 자신의 존재 이유에 대해 의미를 발견하는 순간이다. 기억의 저편으로 물러났다고 여긴 과거가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하는 순간, 홍차에 적신 마들렌의 주름이 펼쳐지듯 기억은 꿈결처럼 솟아난다. 물을 가득 담은 그릇에 작은 종잇조각들을 띄워 놓으면, 구겨져 있던 종이가 서서히 펴지며 구체적인 형체를 갖추듯, 화자의 어린 시절 콩브레 마을이 입체적으로 드러난다. 기억이 되살아나는 회상 장면이 소설 전체를 관통한다. 마들렌은 프랑스 문학사에서 가장 유명한 과자가 되어 ‘마들렌 효과’라는 이름을 얻는다.

의지로는 도달할 수 없었던 기억의 층위, 감각에 의해서만 열리는 장면은 훗날 뇌과학자들에게도 영감을 주었다. 신경과학자 조나 래러는 프루스트의 기억에 관한 집요한 관찰에서 뇌과학자들이 감각과 회상의 상호 연결에 관한 실마리를 잡았다고 본다. 후각과 미각은 다른 감각과 달리 기억을 오래 붙잡아 둔다. 냄새와 맛에 의해 촉발된 기억은 해마에 깊이 저장되어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고 한다. 마들렌에 새겨진 주름처럼 접혀 있던 기억이 홍차와 만나며 펼쳐지는 장면은 과학적 근거가 있다. 마치 미래에서 온 신경과학자처럼 문학적 직관과 상상력으로 프루스트는 비의지적 기억의 힘을 알고 있었다.

마들렌이 불러일으킨 비의지적 기억은 단순히 과거의 재현이 아니라 기억을 통해 재발견하는 생생한 현재다. 많은 소설이 기억의 내용을 서술하는 데 집중한다면, 프루스트는 기억의 발생 방식을 써낸다. 작동 방식에 따라 서로 다른 기억의 결을 드러낸다. 프루스트의 기억 구분법을 읽다 보면 자연스레 나에게도 감각으로 촉발된 기억이 있는지 헤아리게 된다. 애써 떠올리는 의지적 기억일지라도, 가만히 음미하면 그 안에 있던 예상치 못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한다.

 스완네 집 쪽으로>, <프루스트는 신경과학자였다> 영문판 표지. / 필자 제공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스완네 집 쪽으로>, <프루스트는 신경과학자였다> 영문판 표지. / 필자 제공

설날 외할머니댁을 찾으면 어김없이 나를 기다리던 뜨끈한 만둣국이 떠오른다. 큼지막한 만두 세 개가 뜨뜻한 국물에 잠겨 있던 장면이 아른거린다. “이북식 만두는 이렇게 큰 거야.” 손바닥만 한 만두를 한입에 넣기 어려워하던 어린 나에게 설명하듯 건네던 엄마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숟가락으로 만두를 갈라 입안에 넣으면 담백하고 슴슴한 맛이 입안에 나른하게 퍼졌다. 뜨끈한 국물과 함께 만두 속이 몸 안으로 스며들면서 찬 바람에 움츠러들었던 몸이 서서히 풀렸다. 만둣국이 채워준 든든함이 나를 안온하게 감쌌다.

엄마는 어린 시절 얼마나 많은 만두를 빚었는지 농담처럼 나에게 말했다. 내 입속을 채우던 만두는 다름 아닌 엄마를 키운 만두였다. 외할머니가 손수 빚은 속이 꽉 찬 만두는 엄마의 속을 든든히 채웠으리라. 가만히 들여다보면, 마들렌에 새겨진 촘촘한 주름과 만두피의 구불구불한 주름이 어딘가 닮아 있다. 주름 사이사이 기억의 맛이 스며 있기 때문이다. 기억하려 애쓰지 않아도 마치 몸에 새겨진 감각처럼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만두가 입안에 터질 때면, 설날의 외할머니댁 풍경이 펼쳐진다. 오래된 가구의 냄새와 복닥거리는 소란으로 나를 맞아주던 곳. 지금의 내 나이였던 엄마가 그곳에 있다.

칠 남매 중 막내딸로 자라며 늘 자신의 몫을 선언해야 했던 엄마. 장녀로 자란 나와는 다른 방식으로 가족 속에 자리했던 엄마의 삶이 이제야 보인다. 집에서는 늘 분주하던 엄마가, 외갓집에서는 마치 제자리로 돌아온 사람처럼 한층 느긋해 보인 이유를 알 것 같다. 지금의 내가 친정에 가면 그러한 것처럼. 언젠가 명절을 앞두고 만둣국을 끓였다. 기억 속의 만두 맛을 따라 해보려 했지만, 그때 그 맛은 나오지 않았다. 그 시간을 둘러싸고 있던 공기와 온기, 구수하게 퍼지던 냄새가 그 맛을 완성하고 있었다는 것을 이제 안다. 그때의 만둣국은 없지만, 만둣국의 기억이 설날 앞에 놓여 있다.

사진. © 김성민

사진. © 김성민

김성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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