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 리포트] 기후변화로 해마다 요동치는 과일 가격
올여름 폭염-집중호우 잇달아… 딸기 생산시기 늦어져 공급 차질
제주에선 감귤 열과 피해 심각… 당도-과육 품질도 크게 떨어져
한은, 물가 분석 보고서 발표… “상승분 10%는 고온 등이 원인”
유럽 등 세계 각지도 무더위 앓아… 올리브유 생산량 절반 가량 감소
《국내 최대 농수산물 도매시장인 서울 송파구 가락시장은 성탄절인 25일 새벽에도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과일을 거래하는 등 열기로 뜨거웠다. 시장 안에 자리 잡은 서울청과 과일경매장에서 이날 오전 2시 가장 먼저 거래를 시작한 품목은 바로 딸기. 경매에 참여하는 중도매인들의 시선이 집중된 경매대 전광판에 딸기를 재배한 출하주와 품종, 등급, 중량, 수량 등이 시시각각 표기되면서 경매가 진행됐다. 이날 가락시장 곳곳의 과일경매장에서는 상자째로 쌓여 있는 감귤, 단감, 포도, 참외, 토마토 등의 과채류 경매가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겨울 과일이 본격 출하되기 시작했는데도 불구하고 상당수 과일의 평균 가격은 예년보다 크게 높은 수준이다.》 ● “집중호우-폭염… 올해가 15년 딸기농사 중 최악”
27일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에 따르면 24일 기준 딸기 100g의 가격(상품)은 2722원으로 1년 전보다 13.3%, 평년보다는 28.6% 높다. 딸기와 함께 겨울 과일을 대표하는 노지감귤 역시 10개의 가격이 4235원으로 1년 전보다는 9.9%, 평년(2901원)보다 46.0% 비싸다.다른 과채류에서도 토마토(35.6%), 방울토마토(34.4%), 배(17.5%) 등의 가격이 평년보다 높은 수준을 유지하는 상황. 30년 넘게 과일 경매 업무를 해온 박상혁 서울청과 과일부장(경매사·55)은 “지난해 꽃 피는 시기의 냉해로 심각한 타격을 입었던 사과뿐만 아니라 딸기와 귤, 배 등 주요 국산 과일의 작황이 최근 수년간 계속 나빠지고 있다는 것이 과일 유통업계의 고민거리”라고 말했다.
올해도 부진한 과일 작황을 두고 농가에서는 폭염과 열대야, 늦더위에 집중호우까지 겹친 여름 날씨를 주원인으로 꼽고 있다. 충남 논산시에서 딸기 농사를 짓는 박형규 씨(70)는 “15년째 딸기 농사를 짓고 있는데 올해가 딸기 키우기엔 가장 최악이었던 해”라며 “올여름 집중호우가 심해서 딸기 묘목이 침수 피해를 입었고 그 이후엔 사상 최악의 폭염 때문에 생육이 부진했다”고 말했다. 비 피해와 고온 현상으로 딸기 묘목을 제대로 옮겨심는 ‘아주심기’ 시기가 늦어졌는데 줄기마름병이나 탄저병 등에도 시달렸다는 것이다. 그는 “늦여름에도 기온이 안 떨어지니까 8월 말에서 9월 10일 사이에 하던 아주심기를 일주일가량 늦게 한 농가가 적지 않다”며 “이 때문에 이맘때쯤이면 100개씩 열려야 하는 딸기가 40∼60개만 열리는 식으로 생산량이 크게 줄었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도 날씨 때문에 올해 딸기 생산 시기가 늦어지면서 출하 초기의 딸기 수급이 원활하지 못한 상황으로 진단하고 있다. 박한울 한국농촌경제연구원 과일과채관측팀장은 “아주심기가 늦어진 데다 10월과 11월 부족한 일조량이 생육에 영향을 미치면서 가격이 높게 형성되고 있다”며 “12월 초부터는 일조량이 회복됐기 때문에 앞으로는 비교적 원활한 출하를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 해마다 치솟는 기온에 줄줄이 터지는 제주 감귤국산 감귤류의 주 재배지인 제주에서는 올여름 폭염과 열대야로 인한 열과(과일이 갈라지거나 터지는 현상) 피해가 겨울철 실제 생산량을 떨어뜨리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문대림 의원실에 따르면 제주 지역에서는 올해 노지감귤 총 열매 수의 23.3%에서 열과 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집계됐다. 지난해 열과 피해(8.2%)의 3배 가까운 규모다. 이 가운데 고급 감귤류로 꼽히는 레드향의 경우 열과 피해 면적이 36.5%로 1년 전(25.7%)보다 10.8%포인트 늘었다. 과피(껍질)와 과육(내용물)의 생육 불균형으로 과육에 비해 과피가 커지지 않아서 발생하는 열과 피해는 수분의 과잉 공급이나 고온 현상이 불러온다.제주 서귀포시에서 레드향을 재배하는 양상홍 씨(78)는 “올해 나무 상태가 좋아서 열매 솎아주기(적과)를 많이 했는데 폭염 때문에 8월이 지나면서 레드향 열매가 죄다 깨지기 시작했다”며 “열매에 그늘지는 것을 막기 위해 일당을 25만 원씩 줘가며 가지치기도 했는데 상품이 될 수 있는 열매는 결국 10%도 안 맺혔다”고 했다. 제주시보다 평균 기온이 더 높은 서귀포시의 경우 2, 3년 전부터 열과 피해가 본격화됐는데 해가 갈수록 더 심해지고 있다는 것이 양 씨의 설명이다.
문영일 농촌진흥청 국립원예특작과학원 감귤연구센터 연구관은 “올여름 폭염과 폭우가 겹치면서 노지감귤에서도 열과가 많이 발생했다”며 “이상기후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확률이 큰데 올해가 그 피해를 단적으로 보여준 해”라고 지적했다.
올해 제주에서는 감귤류 열매가 너무 굵어져서 당도와 상품성이 모두 떨어지는 문제도 나타났다. 통상 노지감귤과 한라봉, 오렌지 등의 감귤류 과일은 작을수록 당도가 높은데 올해 제주 지역에서는 폭염 때문에 과도한 생육이 이뤄지면서 크기가 작고 당도가 높은 상품(上品) 감귤류 수확량이 크게 줄었다. 오병국 레드향 제주도연구연합회장(77)은 “감귤 열매의 숫자가 줄어들면서 열매 크기가 너무 굵어졌다”며 “레드향의 경우 400∼500g 이상이 되면 너무 크고 당도도 떨어져 팔기가 힘들다”고 말했다.
● “최근 물가 상승분의 10%는 이상기후가 원인”
올해도 열과 피해 등으로 조생종 감귤 출하량이 줄어들 것으로 예측되자 유통업계에서는 가을부터 수시로 제주의 실제 상황을 확인하면서 사전 계약 재배와 저장 물량 확보에 나선 바 있다. 김규효 서울청과 과일부 차장(경매사·46)은 “국산 과일의 경우 최근 4, 5년 사이에 기후변화에 따른 피해가 커진 것으로 느껴진다”며 “이상기후는 과일 생산량을 떨어뜨릴 뿐 아니라 당도와 과육 품질, 착색 등에도 악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평소보다 품질이 나쁜 과일을 더 비싼 가격에 소비하는 결과를 낳는다”고 말했다.
앞서 올 8월 한국은행은 보고서 ‘이상기후가 실물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통해 지난해 이후 최근까지 한국 물가 상승분의 10% 정도는 고온 등 이상기후가 원인이라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2001∼2023년 우리나라 이상기후지수(CRI)와 산업생산, 소비자물가 상승률 간 상관관계를 분석한 결과다. 특히 이상기후 충격은 발생 시점으로부터 3개월 만에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0.03%포인트 더 높였는데 그중에서도 식료품, 과일, 채소가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 해외도 코코아·올리브유 등 ‘비상’
기후변화는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의 작물 생산에도 심각한 타격을 입히고 있다. 초콜릿의 주원료인 카카오부터 커피, 올리브 등 여러 작물에서 기온이나 강수 피해로 인한 작황 부진이 빈발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 ICE 선물거래소에서 거래되는 코코아 선물 가격은 18일 종가 기준으로 t당 1만2565달러(약 1838만 원)를 보여 지난해 같은 기간(4271달러)보다 194.2% 폭등했다. 세계 1, 2위 생산국인 코트디부아르와 가나의 카카오 수확량이 이상기후와 전염병 때문에 1년 전보다 30% 넘게 급감한 결과다.
올리브유 가격도 심상치 않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올 1분기(1∼3월) 국제 올리브유 가격이 t당 1만88달러(약 1476만 원)로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70% 이상 올랐다. 전 세계 올리브 생산량의 60%를 차지하는 유럽이 지난해 여름 기록적인 무더위에 시달리면서 연초 올리브 열매가 잘 맺히지 않았고 여름에는 올리브 열매가 줄기에서 떨어져 나가는 피해까지 겹쳤다. 이에 따라 미국 농무부는 지난해 유럽 지역 올리브유 생산량이 절반 가까이 줄어든 것으로 집계했다.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유엔 식량농업기구(FAO)가 발표하는 세계식량가격지수도 지난달 127.5를 기록해 19개월 만에 최고치를 경신했다. 이 지수는 24개 식량 품목의 가격 동향을 조사해 2014∼2016년 평균 가격을 100으로 두고 비교한 수치다. 주요 품목군 가운데 유지류 가격 지수는 한 달 만에 7.5% 상승하면서 164.1까지 치솟은 것으로 나타났다. 팜유 가격의 경우 과도한 강우로 인한 동남아시아의 생산량 감소 가능성이 가격을 끌어올린 것으로 분석됐다.
이미 과일, 채소 등의 수급 불안을 겪고 있는 한국으로서는 해외 상황까지 먹거리 물가 부담을 키울 수 있는 상황. 전문가들은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품종 개량이나 인프라 확보 등이 시급한 시점이라고 지적한다.
문정훈 서울대 농경제사회학부 교수는 “평균기온이 상승하는 기후변화가 이미 상수가 됐기 때문에 정부가 이런 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품종 개발에 적극 나설 필요가 있다”며 “각 지역의 농가가 재배하는 작물을 기후에 맞춰 전환하는 작업에도 지원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밝혔다. 시간과 비용 투자가 큰 품종 개발이나 작목 전환 등의 작업에는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적극 나설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문 교수는 “농민들도 고온이나 집중호우 피해를 막을 수 있는 장비와 기술을 갖추고 다품종 재배로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김도형 기자 dodo@donga.com
세종=송혜미 기자 1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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