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아코디언' 낸 천명관
'고래'로 명성…10년만에 장편
전후 1950년대 서울 배경으로
앵벌이 아이들의 생존기 담아
자기 삶 연주하는 아이들 통해
폭력·부조리 맞서는 의지 그려
"'고래'를 쓰고 난 뒤 한국 전쟁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얘기한 적이 있어요. 전쟁이야말로 지금 한국 사회 지형을 만든 출발점이고, 우리는 아직 그 자장 안에 있죠. 이번 이야기는 현실의 부조리를 담고 있습니다. 상상력을 뻗어나가는 대로 놓아준 고래와 달리, 이번엔 억제하고 가두려 애썼습니다."
첫 장편소설 '고래'(2004년)로 2023년 인터내셔널 부커상 최종 후보에 등극하며 세계 문학계의 주목을 받았던 작가 천명관(62)은 17일 서울 마포구 창비 서교빌딩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신작 장편소설 '아코디언'의 집필 동기를 이렇게 설명했다. 그는 "젊었을 때이니 거대한 이야기를 써보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며 "하지만 작가는 결국 개인의 이야기를 쓸 수밖에 없고, 제가 선택한 개인은 (전쟁의) 가장 밑바닥에서 희생된 아이들"이라고 부연했다.
아코디언은 '이것이 남자의 세상'(2016년)을 끝으로 작품 활동이 뜸했던 천 작가가 10년 만에 내놓은 장편소설이다. 배경은 누구나 생존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던, 한국전쟁이 끝난 1950년대 서울이다. 작가의 눈은 전쟁통에 부모와 생이별하고 해방촌의 '앵벌이 움막'에서 어른들의 착취에 노출된 아이들로 향한다.
작품 속 아이들은 결코 착취에 굴복하기만 하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다. 피란길에서 어머니 손을 놓친 고아이자 주인공인 '동이'가 아코디언을 우연히 줍게 되면서, 꺼져만 가던 생의 감각은 리듬을 타고 다시 살아난다. 고사리 손에 깡통이 아닌 아코디언의 건반이 얹어지자 버스 정류장 앞, 지하도, 백화점 앞은 더 이상 구걸을 위해 찾는 곳이 아닌 당당한 '거리 공연' 무대가 됐다. '럭키 서울' '목포의 눈물' '슈샨 보이' '홍콩아가씨' '베사메무쵸' 등 작품 속에서 등장하는 당대의 유행가는 슬픔과 희망이 공존했던 동시대를 비춘다.
천 작가는 "당시 노래들은 민중의 삶과 아주 밀접하게 닿아 있었고, 우리의 상처와 트라우마, 익살과 아이러니,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도 담아냈다"며 "그 노래들이 탄생한 배경을 살펴보며 많은 영감을 떠올렸다"고 말했다. 소설에서 음악은 죽음의 반대말로도 읽힌다. 작가는 "두 개의 에필로그 중 하나는 면도칼이 등장하고, 다른 하나는 아코디언이 등장한다"며 면도칼이 죽음을 상징한다면 아코디언에는 생의 의지를 담으려 했다고 설명했다.
자신감을 찾아가는 아이들은 더이상 스스로를 버려진 존재라 자조하지 않고, 서로 돕고 합을 맞추어가며 새로운 삶의 가능성에 눈뜬다. 굶주리면서도 착취를 벗어나려 도망치고, 때론 싸우며 저항한다.
"인류가 존재하는 한 타인을 지배하고 착취하려는 힘과 그로부터 벗어나려는 자유의지는 언제나 투쟁하는 관계에 있다고 생각해요. 강력한 지배 욕구에 우리가 패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을 이겨내려는 의지는 항상 있죠. 이 이야기 안에 그런 알레고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천 작가는 1950년대 서울을 현실적이면서 압축적으로 담아내기 위해 공을 들였다. 2012년 '길의 노래'란 제목으로 1년간 창비 블로그에 연재한 원 작품을 약 2년간 개작했다. 원고지 1000매가 넘는 분량을 약 300매로 줄이고, 이야기를 다시 구상하며 스타일과 문체, 구성 모두를 바꿨다. 소설가 데뷔 전후로 각본가로도 활동한 그가 2022년 영화 '뜨거운 피'로 입봉하며 영화계에 발을 담그고 있던 사이, 예전에 써두었던 원작이 성에 차지 않게 된 것이다.
"40대에 데뷔해서 10년간 작가생활을 하다가 병이 도져서 영화를 한다고 또 10년을 보냈죠. 세월이 많이 흐르다보니 생각도 바뀌었는지, 이야기가 맘에 안 들었죠. 개작을 하다보니 더 힘들었던 것 같아요. 제가 쓴 책 중에서 가장 지난한 과정을 거쳤고, 스스로도 가장 힘든 작업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각본가에서 소설가로 변신하고, 영화 감독으로 데뷔한 다음, 환갑을 넘어 다시 책상에 앉은 천 작가는 향후에도 작품 활동을 계속 이어나갈 의지를 밝혔다. "50대 때 다시 영화를 하면서 '10년은 영화를 더 해보자. 그 이후 마지막은 소설을 쓰면서 남은 삶을 보내지 않을까' 하고 구상을 했었어요.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고, 앞으로도 소설은 계속 쓸 거예요. 밀려 있는 집필 스케줄이 있으니 계속 달려야 할 것 같네요."
[최현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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