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정 받을 자격도 싸워야 했다…'이 조항' 하나로 인한 5년의 국제분쟁 [이상엽의 중재인사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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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생성형AI

2020년, 코로나19가 글로벌 공급망을 뒤흔들었다. 국내 특수 원단 제조업체 A사는 10년 넘게 납품 거래를 이어온 유럽계 브랜드 B사(스웨덴)로부터 일방적으로 기존 주문들을 취소 또는 축소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A사는 이미 원자재를 발주하고 생산에 착수한 상태였다. 청구 금액은 미화 60만 달러를 넘겼다.

코로나19는 일단락됐다. 하지만 미·중 무역분쟁, 중동전쟁과 같은 지정학적 갈등, 수출입 규제의 급변, 공급망 교란 등 글로벌 거래에서 ‘예상치 못한 충격’은 언제든 다른 얼굴로 반복된다. 이 사건이 지금 읽혀야 하는 이유는 분쟁의 원인이 아니라, 분쟁이 터졌을 때 A사가 무엇을 놓쳤는가에 있다.

3라운드 공방: 중재 → 법원 → 중재

2020년 6월, A사(신청인)는 B사(피신청인)를 상대로 대한상사중재원(KCAB)에 국제중재를 신청했다. 그런데 돌아온 첫 판정문에는 예상 밖의 결론이 담겼다.

“이 사건에 대한 판정 권한이 없다.”

중재판정부(단독 중재인)는 유효한 중재합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A사의 청구를 본안에서 따져 보기도 전에 아예 각하시켰다. 본격적으로 자웅을 겨루려는 두 복서에게 링을 잘못 찾아왔으니 그냥 내려가라는 뜻이다. 이를 납득할 수 없었던 A사는 중재법 제17조에 따라 법원에 권한심사를 신청했고, 2023년 1월 서울중앙지방법원이 중재판정부의 판단을 뒤집었다. ‘유효한 중재합의가 존재한다.’

법원의 확인을 받은 A사는 자신 있게(?) 다시 한번 KCAB에 국제중재사건을 제기했다. 새로운 중재판정부가 구성되고 우여곡절 끝에 최종 판정은 2024년 8월에 내려졌다. 다행히 A사는 이번에는 웃을 수 있었다. 본안에 대한 다툼에만 집중할 수 있었던 A사는 승소했다. 처음 중재를 신청한 지 거진 5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핵심 쟁점 1. 중재합의는 어디에 있었나

대한상사중재원의 창립 60주년 기념 행사 모습. 대한상사중재원 제공

대한상사중재원의 창립 60주년 기념 행사 모습. 대한상사중재원 제공

이 사건의 첫 번째 전장은 계약의 내용이 아니었다. ‘중재합의가 있느냐 없느냐’였다.

A사는 매 거래마다 견적송장(Proforma Invoice, PI)을 발행했고, 거기에 KCAB 중재조항이 명시돼 있었다고 주장했다. 반면 B사는 자체 발주서(Purchase Order, PO)를 보냈을 뿐, PI에 서명하거나 중재조항에 명시적으로 동의한 적이 없었다고 맞섰다.

양측이 준거법으로 합의한 것은 CISG(유엔 국제물품매매협약)였다. 한국과 스웨덴 모두 CISG 가입국이기도 하다. CISG는 국내법과 별개의 국제 통일 규범이다. 국경을 넘는 물품매매 계약의 성립·이행·손해배상을 포괄적으로 규율한다. 선행사건의 중재판정부는 CISG 제19조 제1항을 핵심 근거로 삼았다.

‘승낙에 추가, 제한 또는 변경이 포함된 경우, 이는 청약의 거절이자 새로운 청약이다.’ PI를 청약으로 변경된 내용이 담긴 PO를 반대청약으로 보면, 최종 계약의 기초는 PO였고 PO에는 중재조항이 없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CISG 제9조는 당사자 사이에 확립된 관행이 계약을 구속함을 규정한다. 10년 넘는 거래 기간 동안 모든 PI에 중재조항이 존재했고, B사가 단 한 번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거래 관행으로 편입된 묵시적 합의라는 것이다. 법원은 전자우편 교환을 통한 의사표시를 서면 중재합의로 인정하는 중재법 제8조 제3항도 적용했다.

같은 CISG를 읽고도 중재판정부와 법원이 정반대의 결론에 도달했다. 사실 A사 입장에선 처음부터 이 논쟁이 발생하지 않도록 계약 체결 단계에서 정식으로 계약서를 체결했으면 애초에 차단될 이슈였다.

핵심 쟁점 2. 중재인의 국적이 중립성을 담보해주나

 게티이미지뱅크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분쟁의 시시비비를 가려줄 중재인 선정은 절차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다. 일반 소송과 달리 내 손으로 직접 중재인을 선정하거나 최소한 의견을 개진할 수 있다는 게 중재제도의 존재 이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중요성 만큼 중재판정부 구성은 단순한 절차 문제가 아니다. 중재판정부가 1인으로 구성된다면 양 측은 특히 단독중재인의 국적에 더욱 민감해질 수밖에 없다. 이 사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첫 번째 중재에서 B사는 중재인 선정 절차에 아예 응하지 않았다. 보통은 국제중재규칙에 따라 양측이 단독중재인을 직접 협의해서 지명하지만, 한 쪽이 절차에 응하지 않으면 이는 원칙적으로 불가능 해진다. 이에 KCAB 사무국은 유일하게 절차에 참여하고 있던 A사의 의사를 존중해 중재인 숫자를 1인으로 정했고, 직접 선정했다.

선정된 단독 중재인은 한국 국적이었다. 단독 중재인이 선정되고 난 이후에 절차 대응을 시작한 B사 입장에서는 단독 중재인 선정 과정에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는 않았다. 그리고 결과는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B사에 유리한 결과가 나왔다.

두번째 중재는 달랐다. B사도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절차에 참여해 사무국에 의견을 제출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자유로운 협의에도 불구하고 양측은 단독 중재인 합의 지명에 실패했고, 선정 권한은 다시 사무국에게 주어졌다.

이번에 선정된 중재인은 유럽 국적이었다. 대신 그는 한국 기업 관련 국제중재 사건을 다수 수행한 경험이 있었다. 사무국으로서는 균형 잡힌 실질적 중립성의 기준이 됐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바는 분명하다. 중재인의 중립성은 단순히 국적으로만 판단되지 않는다.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분쟁의 실체에 접근하는 당사자의 논리성과 이를 뒷받침하는 법적 근거다. 이를 객관적으로 판단할 줄 아는 자질이 중재인의 진정한 중립성이라고 할 수 있다.

또 하나의 패착: 변호사 없이 시작한 국제중재

이 사건에서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사실이 있다. A사는 첫 번째 중재 과정에서 전문 법률대리인을 처음부터 선임하지 않았다.

국제중재는 국내 소송과 구조가 근본적으로 다르다. 중재합의의 형식 요건, CISG 등 준거법 해석, 서면 증거의 구성 방식, 중재인 선정 절차에서의 전략적 대응 — 이 모든 것이 초기에 형성되고, 한 번 기록된 것은 나중에 고치기 어렵다. 특히 이 사건처럼 ‘중재합의의 성립 여부’ 자체가 핵심 쟁점인 경우, 첫 서면에서 어떻게 논리를 구성했느냐가 절차 전체의 방향을 결정한다.

비용을 아끼기 위해 전문가를 늦게 선임하는 선택이 결과적으로 훨씬 큰 비용으로 돌아오는 것이 국제분쟁의 현실이다. A사는 그것을 5년에 걸쳐 경험했다. 첫 단추를 잘 못 낀 거 치고는 너무 비싼 수업료를 내야 했다.

이 사건이 남긴 다섯 가지 질문

5년의 공방 끝에 A사는 일부 승소했다. 하지만 전체 청구액 대비 회수된 금액은 제한적이었고, 취소된 주문에서의 손해는 끝내 인정받지 못했다. 소요된 시간과 비용을 감안하면 어느 쪽도 온전한 승자라 부르기 어렵다.

해외 거래가 있는 국내 기업이라면 이 사건을 자사에 대입해볼 질문이 있다:

- 정식 계약서도 없이 국제거래를 지속해오고 있지는 않은가?
- 최소한 상대방이 우리 견적서(PI)의 중재조항을 명시적으로 ‘확인’했는가, 아니면 그냥 지나쳤는가?
- 장기 거래관계에서 계약 체결 방식이 일관되게 유지되고 있는가? 관행이 내게 유리한가, 불리한가?
- 계약서에 불가항력 조항이 있는가? 팬데믹·무역제재·공급망 붕괴 같은 시나리오를 실제로 커버하는가?
- CISG가 우리 해외 거래에 자동 적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그 내용을 파악하고 있는가?
- 국제분쟁이 발생할 경우 가장 먼저 연락할 법률 전문가가 지금 있는가?

이 사건의 교훈은 명확하다. 분쟁이 터진 뒤 대응 방법을 찾는 것과, 분쟁이 터지기 전에 대비를 갖춰 두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A사가 5년을 싸운 근본적인 이유는 상대방이 나빴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계약서 한 줄, 절차적 대응 하나, 전문가 선임의 타이밍 — 처음부터 갖춰야 할 것들이 갖춰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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