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야 아무리 외쳐봐라, 시장은 DEI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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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첫 주 뉴욕은 프리즈 뉴욕, 테파프 뉴욕, NADA 등 대형 아트페어가 연달아 열리며 아트위크를 맞이했다.

5월 첫 주 뉴욕은 프리즈 뉴욕, 테파프 뉴욕, NADA 등 대형 아트페어가 연달아 열리며 아트위크를 맞이했다.

미국 뉴욕은 언제나 바쁜 도시이나 5월과 9월엔 더 분주합니다. 미술 애호가들에겐 말이죠. 메이저 경매사들의 주요 경매와 대규모 아트페어가 열리는 달이기 때문입니다. 올해 5월도 마찬가지입니다. 프리즈 뉴욕(Frieze NY, 7~11일)을 위시해 테파프 뉴욕(Tefaf NY, 8~13일), NADA(7~11일)가 거의 동시에 열렸습니다. 작년까지만 해도 약 일주일의 간격이 있었는데, 올해는 겹친 것입니다. 때맞춰 미술관들도 대형 전시를 일제히 오픈해 관객들의 발길이 분주했습니다.

제프 쿤스가 2021년 페이스갤러리로 이적한 이후 처음으로 가고시안과 협업을 진행했다. 풍선 헐크에서 착안한 신작은 ‘헐크 오르간’, ‘헐크 튜바’, ‘헐크 용과 거북이’ 등 석 점으로 시리즈를 이룬다. 첫날 약 300만달러에 판매된 것으로 전해졌다. / 사진. © 이한빛

제프 쿤스가 2021년 페이스갤러리로 이적한 이후 처음으로 가고시안과 협업을 진행했다. 풍선 헐크에서 착안한 신작은 ‘헐크 오르간’, ‘헐크 튜바’, ‘헐크 용과 거북이’ 등 석 점으로 시리즈를 이룬다. 첫날 약 300만달러에 판매된 것으로 전해졌다. / 사진. © 이한빛

하우저앤 워스 갤러리는 라시드 존슨의 대형 신작 회화 ‘Speed Trap’을 전면에 걸었다.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작가의 대대적인 개인전을 개최하고 있다. / 사진. © 이한빛

하우저앤 워스 갤러리는 라시드 존슨의 대형 신작 회화 ‘Speed Trap’을 전면에 걸었다.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작가의 대대적인 개인전을 개최하고 있다. / 사진. © 이한빛

신진 작가와 갤러리를 만날 수 있는 포커스 섹션엔 런던의 퍼블릭 갤러리가 참여, 다니엘 브레스웨이트-셜리 작가의 인터랙티브 비디오 게임 기반 설치 작품을 선보였다. 관객은 선택형 모험 이미지를 구축할 수 있는데 이 과정에서 흑인 트랜스젠더가 겪는 혐오와 인종차별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다. / 사진. © 이한빛

신진 작가와 갤러리를 만날 수 있는 포커스 섹션엔 런던의 퍼블릭 갤러리가 참여, 다니엘 브레스웨이트-셜리 작가의 인터랙티브 비디오 게임 기반 설치 작품을 선보였다. 관객은 선택형 모험 이미지를 구축할 수 있는데 이 과정에서 흑인 트랜스젠더가 겪는 혐오와 인종차별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다. / 사진. © 이한빛

흑인 작가 강세는 여전, Frieze

지난 3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스미스소니언을 저격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합니다. ‘미국 역사에 진실과 건전성을 회복하기’라는 제목의 행정명령인데, “부적절한 이념을 이러한 시설에서 제거해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트럼프가 지적한 부적절한 이념이란 성소수자나 소수인종 문제에서 진보적 입장을 취하는 것을 말합니다. 기존 미술사나 역사에서 소외되고 기술되지 않았던 소수자들의 입장에서 새로운 시각을 도출해보는, 이를 통해 좀 더 입체적으로 우리 사회를 돌아보는 시도가 매우 ‘불온한’ 것이 된 것입니다. 한마디로 DEI(Diversity, Equity, Inclusion·다양성, 평등, 포용)가 아닌, 백인 남성 작가들 혹은 전통적인 장르의 미술에 무게중심을 둔 것인데 이 때문에 문화계 곳곳에서 비난의 목소리가 높았습니다. 정권의 입맛에 맞는 예술만이 예술이냐면서 ‘문화 전쟁’, ‘이념적 순결 테스트’라는 단어까지 등장했죠.

그러나 정치권이 뭐라고 하든 시장은 별다른 반응이 없습니다. 프리즈 뉴욕에서는 여전히 흑인 작가의 강세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아모아코 보아포 같은 이미 유명한 작가들에 이어 최근 시장에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작가들의 작업이 전면에 배치됐습니다. 여성, 게이, 라틴, 아시아 작가와 같은 DEI의 표상과 같은 작가들의 약진도 두드러졌습니다. 대표적으로 허쉬혼미술관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하는 아담 펜들턴은 페이스갤러리에서 선보였습니다. 페이스 부스는 펜들턴이 직접 큐레이팅했고, 전시한 6점 모두 16만5000달러~42만5000달러에 팔렸습니다. 또 캐리 매 윔즈(굿맨 갤러리)의 대작은 10만달러에 네덜란드 컬렉터에게 넘어갔습니다. yBa 여성작가인 트레이시 에민(화이트큐브 갤러리)의 대형 회화는 18만달러에, 일본계 브라질 작가인 토미 오타케(페로탱)는 35만달러에 솔드아웃됐습니다.

시장이 어렵다는 것은 초고가 작품의 부재로 반영됐으나 유명 작가의 적당한 가격대의 작품들은 속속 팔려나간 것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쿠사마 야요이의 호박 조각은 없었지만, 그의 드로잉은 인기를 끌었고, 2021년 페이스갤러리로 옮긴 제프 쿤스는 이적 이후 처음으로 가고시안과 협업으로 헐크 신작(헐크 오르간, 헐크 튜바, 헐크 용과 거북이)을 공개했습니다. 3점 시리즈는 첫 날 팔려나갔죠. (정확한 가격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시장에서는 약 300만달러에 거래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한국 갤러리는 총 3곳이 나왔는데 갤러리현대는 문경원 작가의 솔로 부스로 꾸렸습니다. 겨울 숲의 풍경으로, 눈이 가득 쌓인 나뭇가지가 외로우면서도 풍성한 느낌을 줍니다. 비엔날레 참여 작가로 전준호 작가와 함께 영상 및 설치작업을 주로 공개해왔는데 이번엔 오랜만의 회화였습니다. 국제갤러리는 박서보, 강서경을 비롯한 전속작가들의 작업을 선보였고, G갤러리는 한국작가 송예환의 솔로 부스를 선보였습니다.

가고시안 갤러리에 출품된 안나 웨이얀트의 작품. / 사진. © 이한빛

가고시안 갤러리에 출품된 안나 웨이얀트의 작품. / 사진. © 이한빛

구스타프 클림트의 ‘윌리엄 니 노르테이 도우오나 왕자의 초상’, 가나 출신의 서아프리카 왕자를 그린 그림이다. 클림트 사망 이후 유품 경매에 나왔다 오랜시간 찾지 못해 잃어버린 것으로 추정됐으나, 최근에 다시 나타났다. 비너로이터 & 콜바허 갤러리. / 사진. © 이한빛

구스타프 클림트의 ‘윌리엄 니 노르테이 도우오나 왕자의 초상’, 가나 출신의 서아프리카 왕자를 그린 그림이다. 클림트 사망 이후 유품 경매에 나왔다 오랜시간 찾지 못해 잃어버린 것으로 추정됐으나, 최근에 다시 나타났다. 비너로이터 & 콜바허 갤러리. / 사진. © 이한빛

가나아트 갤러리는 전광영 작가의 구작을 비롯 알렉산더 칼더의 스테빌 등을 선보였다. / 사진. © 이한빛

가나아트 갤러리는 전광영 작가의 구작을 비롯 알렉산더 칼더의 스테빌 등을 선보였다. / 사진. © 이한빛

올 인클루시브 럭셔리 TEFAF

프리즈가 근현대 미술에 집중한다면 테파프는 그보다는 범위가 넓되, 가격대가 높은 작품들을 선보이는 페어입니다. 시간적으로는 현대미술부터 근대 거장, 중세, 고대 조각까지 다루며 장르는 명품 가구와 보석, 시계 브랜드까지 확장합니다. 1988년 네덜란드 마스트리치에서 시작해 2016 뉴욕까지 진출한 페어로, 올해는 90개 갤러리가 참여했습니다.

프리즈에 참여한 갤러리가 테파프에도 참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만 하이엔드 컬렉터를 타깃하다보니 출품작은 전혀 다르죠. 가고시안은 안나 웨이얀트의 소품과 회화를 출품했습니다. 17세기 네덜란드 정물화 스타일을 현대적으로 응용하는 그의 작업은 워낙 시장에서도 인기가 좋지만, 이번 출품작은 목걸이, 귀걸이, 팔찌 같은 액세서리를 그렸습니다. 보석도 출품되는 페어와 잘 어울리죠. 데이비드 즈워너는 가을 MoMA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예고한 루스 아사와를 선보였습니다. 근대 거장 작품 중에는 클림트의 ‘윌리엄 니 노르테이 도우오나 왕자의 초상’이 나왔는데 흑인 인물화라는 것만으로도 관심이 집중됐습니다. 대부분 근대 작품들은 소장 이력을 공개해 누구나 볼 수 있게 하는 것도 이 페어의 특징입니다. 진품 여부가 확실하니 가격대가 약간 더 높더라도 컬렉터들에겐 안전하게 느껴지니까요.

타티아나 피터스 갤러리는 샤를 드가이터의 조각 작품을 선보였다. 박제한 소라게가 기상천외한 껍질 안에 들어가 있다. / 사진. © 이한빛

타티아나 피터스 갤러리는 샤를 드가이터의 조각 작품을 선보였다. 박제한 소라게가 기상천외한 껍질 안에 들어가 있다. / 사진. © 이한빛

다음 잘나가는 작가는 여기, NADA

신진작가의 발굴처로 통하는 NADA는 올해는 장소를 옮겨 26번가 스타렛-리하이 빌딩에서 열렸습니다. 도보 5분 거리로 프리즈에서 멀지 않기에 두 페어를 하루에 보는 관객도 많았습니다. 뉴욕에서 11번째 열리는 페어엔 111개 갤러리가 참여했습니다. 가격대도 4만달러 이하, 대부분 2만달러 이하 작품이어서 세일즈도 좋았다는 후문입니다.

1990년생 작가인 크리스토퍼 폴 조던은 영국 런던 갤러리인 칠리 프로젝트(Chilli Project)가 소개했습니다. 방충망이나 바다에서 건져 올린 그물에 아크릴 물감을 투과시키는 방식으로 ‘이주’를 이야기하는 그의 작품은 이미 예일 졸업전시에서부터 페로탕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아프리계 미국인으로 자신의 정체성과 소외에 대해 섬세하고도 시적으로 풀어내, 컬렉터들이 열광하는 작가입니다. 가격대도 4000~2만달러 사이로, 첫날 완판됐습니다. 이외에도 극사실적 정물을 독특한 구도로 화면을 구성해 감각적 위트가 돋보인 다니엘 프렛웰(엘리스 아마티 갤러리), 박제한 소라게를 똬리를 튼 뱀이나 죽은 개구리 껍질 조각 안에 배치한 샤를 드가이터(타티아나 피터스 갤러리), 신체를 추상적으로 표현한 스페인 화가 바르바라 알레그레(도잉아트 갤러리)도 주목받았습니다.

[위에서부터] 프리즈 뉴욕 2025 전경, 테파프 뉴욕 2025 전경, NADA 2025 전경. / 사진. © 이한빛

[위에서부터] 프리즈 뉴욕 2025 전경, 테파프 뉴욕 2025 전경, NADA 2025 전경. / 사진. © 이한빛

미술시장에 어른거리는 트럼프의 그림자 ‘관세’

이번 뉴욕 아트위크는 시장이 활기를 되찾았다는 것이 확실해 보였습니다. 지난해 글로벌 미술시장 규모는 2023년 대비 12% 줄어든 575억달러를 기록했죠. 팬데믹 이후 나타난 급격한 회복세가 꺾이며 침체기에 들어선 것입니다. 특히 고가 미술품시장의 위축이 두드러졌습니다. 다행히 겨울이 지난 뉴욕 미술시장은 거래가 서서히 회복되는 모양새입니다. 전년보다 더 많은 관람객이 찾은 것도 회복세의 시그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다만, 정치적 불안정이 시장의 변동성을 키우지 않을까 하는 우려는 여전합니다. 트럼프 집권 이후 시작한 관세 전쟁이 자산시장에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지난 4월 3일 관세 도입이 발표되자 전 세계 주식시장이 급락했습니다. 물론 일주일 만에 유예를 발표하자 바로 반등했지만요. 블룸버그 억만장자 지수(Bloomberg’s Billionaires’ Index)에 따르면, 관세 발표 이후 세계 500대 부자의 총자산은 208억달러 감소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하루 감소치로는 최대였습니다. 이 같은 변동성은 슈퍼 자산가 컬렉터들의 심리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큽니다. 쉬운 선택은 변동성이 줄어들 때까지 구매를 미루는 것이죠.

이 같은 거시적 변화 외에도 실제 갤러리들이 겪는 어려움도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미술품은 ‘무관세’로 분류됐지만, 트럼프 행정명령 이후 회색 영역이 늘어났습니다. 백악관은 ‘예술작품, 사진, 포스터 등은 상호관세 적용 대상에서 제외한다’고 했지만, 기준이 명확하지 않은 것이 문제입니다. 폴 도노반 UBS 글로벌 자산 매니지먼트 수석 경제학자는 “최신 무역 관세 조치(미국으로 수입되는 모든 상품에 적용되는 10% 보편적 관세 및 추가 국가별 관세)는 모든 예술 작품을 포함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분류가 일관되지 않습니다. 현재 정책 수립 과정에서 예술 작품의 생산 및 판매 과정의 복잡성이 충분히 고려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라고 미술 정보 플랫폼인 아트시(Artsy)에 코멘트했죠. 회화, 그림, 판화, 조각과 같은 전통적 매체 이외에 디지털 예술이나 퍼포먼스, 디자인 작품은 아예 분류 대상에도 들어가지 않습니다. 미국 국적 작가가 중국에서 작품을 만들었다면, 해당 작품은 중국산으로 분류되어 최대 30%의 관세를 물어야 하는 상황입니다.

이번 페어에 참가한 일부 해외 갤러리들은 자국에서 작품을 가져오기보다 미국 내에 보관하고 있던 작품으로 전시작을 교체하기도 했습니다. 한 갤러리 대표는 “작품을 보내려다 다른 갤러리가 관세를 10% 물었다기에 포기했습니다. 갑자기 가격을 올릴 수 없으니 이미 미국에 있던 작품으로 바꿨습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트럼프의 관세가 미술시장을 재편하고 있는 것이죠. 불확실성이 여느 때보다 강한 시기입니다.

이한빛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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