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화폐를 이용한 새로운 금융 시스템인 탈중앙화 금융(디파이)이 3년 만에 투자자들의 이목을 다시 집중시키고 있다. 2022년 테라의 몰락, 전 세계 3위 가상화폐 거래소인 FTX의 파산 등 연이은 대형 사고로 고사 직전까지 몰렸지만 지난 연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당선된 후 전폭적인 지원으로 되살아날 계기를 마련했다. 여기에 블랙록 같은 전통 금융사들이 진출하고 스테이블코인 열풍이 불며 시장 규모를 200조원까지 불렸다. 개인투자자들도 디파이 관련 코인에 눈독을 들이는 분위기다.
하지만 가상화폐 특성상 높은 변동성은 여전히 투자자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 여기에 개인투자자들의 심리를 노리고 빠른 시간 내에 몸집을 불린 프로젝트도 있어 주의를 요한다. 오랫동안 안전하게 운영되거나 코인베이스와 같은 대형 회사들이 지원하는 코인들을 주목하는 것이 위험을 줄이는 방법이라고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디파이, 트럼프 행정부 등에 업고 부활
디파이는 블록체인 기술을 이용해 은행이나 증권사와 같은 금융기관을 통하지 않고 예금이나 대출 그리고 거래와 같은 금융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말한다. 중개자 없이 예금과 대출 수요를 연결하고 거래를 직접 이어주기 때문에 중간 마진이 없어 예금자에게는 더 높은 이자를, 대출자에게는 더 낮은 금리를, 거래자에게는 더 낮은 수수료로 거래를 이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반대로 중개자가 없기 때문에 거래 상대방 또는 거래 플랫폼에 대한 신뢰가 필수적이다.
2022년 발생한 테라의 몰락과 FTX의 파산은 디파이의 단점이 극명하게 부각된 사건이다. 기초자산 없이 알고리즘으로 가격을 고정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 테라 프로젝트는 가격 변화에 따른 일괄 매도를 막지 못해 50조원 이상의 시가총액이 사흘 만에 증발했다.
그러나 올해 들어 디파이 시장은 다시 부흥기를 맞고 있다. 특히 하이퍼리퀴드 등 새롭게 등장한 프로젝트들이 이번 부흥을 이끌고 있다. 무늬만 탈중앙화였을 뿐 중앙에서 통제하던 기존 디파이의 문제점들을 보완·개선했다는 측면에서 이번 부흥이 투기 열풍의 재연이 아니라 구조적 변화에 따른 체질 개선이라는 평을 끌어내고 있다. 디파이 시장의 총예치액은 9월 말 기준 200조원을 회복해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고 하이퍼리퀴드는 시가총액 11위에 올랐다.
자체 체질 개선 외에 디파이의 부흥을 촉진하는 이유는 또 있다. 바로 미국 정부의 태도 변화다. 트럼프 대통령 당선 이후 가상화폐에 대해 180도 바뀐 미 행정부는 최근 증권거래위원회(SEC)와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 중심으로 가상화폐의 제도권 편입을 위한 정책과 제도 개선에 나서고 있다.
지난 7월 말 SEC에서는 프로젝트 크립토로 명명된 새로운 정책을 발표하며 가상화폐 혁신을 주도하겠다고 선언했다. 주식을 포함해 금융시장에서 거래되는 주요 자산을 블록체인 네트워크에 올리겠다는 취지다. 지난달에는 SEC와 CFTC가 14년 만에 공동 라운드테이블을 개최하고 뉴욕증권거래소, 나스닥, 시카고상품거래소(CME)와 같은 전통 거래소 대표들과 크라켄, 로빈후드를 비롯한 가상화폐 플랫폼 경영진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디파이 시장 탐내는 전통 금융
여기에 전통 금융권이 호시탐탐 진출을 노리는 것도 호재다. 주식 등 투자 자산을 블록체인 네트워크에 올리는 실물자산토큰화(RWA)가 진행되면 다음 단계로 디파이를 활용함으로써 높은 수익률을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블록체인 기술로 만들어진 토큰은 디파이로 제공되는 예치와 대출용 담보로 공급될 수 있다. 따라서 예치를 통해 은행 예금보다 더 높은 수익을 거두고 대출용 담보로 제공함으로써 대출 이자의 일부를 받는 것이 가능하다.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인 블랙록은 지난해 3월 머니마켓펀드(MMF)를 토큰화한 비들(BUIDL)을 내놓은 바 있다. 미국 국채 등을 기초자산으로 한 이 펀드는 1년 만에 수십억 달러 규모로 성장했다. 이어 올 초에는 엘릭서라는 디파이 프로토콜과 협력을 맺어 비들 토큰으로 예치해 대출 등에 활용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이 같은 추세는 다른 운용사로 확산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불고 있는 스테이블코인 열풍도 디파이에 힘을 싣는다. 블록체인 기술에 기반한 스테이블코인은 가상화폐의 가장 큰 문제인 가격 변동성이 없기 때문에 디파이에서 기축통화처럼 활용될 수 있다. 스테이블코인 시장은 올해 들어 350조원 규모를 넘었다.
안정성과 고위험 구별 뚜렷
그러나 디파이에는 구조적 위험이 존재한다. 중앙화된 관리 주체가 없어 문제 발생 시 신속한 대응이 어렵다. 프로그램 오류나 해킹에 노출될 위험도 있다. 2022년 테라는 설계 오류로 급격히 붕괴했고 FTX는 고객 자금을 불법적으로 사용해 파산했다. 높은 수익률만 추구하면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 있다.
따라서 높은 수익률보다 낮은 위험도를 우선시해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조언이다. 장기간 사고 없이 안정적으로 운영된 프로젝트를 주목하되 최신 트렌드를 반영하지 못해 성장이 제한적인 프로젝트는 투자 우선순위에서 미뤄두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게 좋다.
이에 해당하는 코인으로는 가장 먼저 체인링크를 들 수 있다. 디파이 산업의 '청바지'로 불리는 프로젝트로 블록체인 네트워크에 외부 데이터를 연결해주는 오라클 기능을 수행한다. 예를 들어 디파이 대출에서 비트코인 가격이 1억원 이하로 떨어지면 담보를 자동으로 청산한다는 스마트 콘트랙트를 적용할 때 이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비트코인 가격에 대한 실시간 정보가 필요하다. 이를 공급해주는 곳이 바로 체인링크다. 2017년 시작됐으며 현재 시가총액 14위에 올라 있다.
자동화된 마켓 메이커(AMM) 모델을 처음으로 도입해 탈중앙화 거래소(DEX)를 대중화한 유니스왑도 주요 디파이 코인으로 꼽힌다. 최근 등장한 하이퍼리퀴드에 시장 주도권을 내줬지만 2018년 시작돼 오랜 이력을 보유하고 있다. 특히 조 바이든 정부 시절 코인의 증권성 여부와 관련된 소송에 시달리면서 어려움을 겪었지만 SEC가 연초 소송을 취하해 법적 불확실성이 해소됐다.
반면 최근 디파이 시장 성장세를 주도하는 코인들도 있다. 비교적 신생 프로젝트로 가격이 수배 급등했지만 그만큼 변동성이 크고 사업성 검증에 시간이 필요해 위험성도 높아 투자에 주의를 요한다. 이 중 가장 눈길을 끄는 코인은 현재 가상자산 시가총액 11위인 하이퍼리퀴드로 탈중앙화 거래소 중 거래량 1위를 기록하고 있다. 가상자산에 특화된 선물 거래를 무기한 제공해 전문 코인 투자자들에게 인기가 높지만 국내 거래소에서는 아직 거래를 지원하지 않아 투자하기 어려운 것이 단점이다.
트럼프 대통령 일가가 지원하는 월드 리버티 파이낸셜도 단시간에 성장한 디파이 코인으로 꼽힌다. 정치적 논란에도 불구하고 시가총액 6조7000억원으로 29위에 위치해 있다. 탈중앙화 대출 서비스를 중심으로 자체 스테이블코인 USD1을 발행해 사용처를 늘리고 있다. 전체 토큰의 22.5%를 트럼프 일가가 보유해 이해충돌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는 점은 투자 시 주의해야 할 위험 요인이다.
[김용영 엠블록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