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의 5월은 '미술의 시간'으로 불린다. 프리즈(Frieze), 테파프(TEFAF), 트라이베카, 인디펜던트, 나다(NADA), 1-54 등 아트페어가 둘째 주부터 최소 12개 이상 동시 개막하기 때문이다. 뉴욕의 대표 미술관들이 수준급 전시를 선보이고, 전 세계 컬렉터가 모인 때를 겨냥해 크리스티와 소더비, 필립스 등은 봄 경매의 출품작들을 미리 공개했다.
올해 뉴욕 아트위크는 수 많은 악재 속에 열려 긴장감이 높았다. 미술 시장의 전반적인 침체에 더해 트럼프 정부의 강력한 관세 부과 정책, 이에 따른 무역 분쟁 위협이 지속되고 있어서다. 독일, 남미 등에서 참여한 갤러리들은 박람회가 열리기 하루 전날까지 작품 일부가 관세 당국에 묶여 있다 개막 하루 전날 반출된 사례도 빈번했다고 밝혔다. 비관론과 낙관론이 교차하는 가운데 딜러들은 "세계 미술시장 점유율의 43%를 차지하는 미국, 그 중에서도 금융과 예술의 중심인 뉴욕 아트위크가 시장의 미래를 가늠하는 분기점"이라고 입을 모았다.
프리즈 1시간 만에 팔린 42억짜리 ‘헐크’
지난 7일 오전 11시 프리즈 뉴욕이 열리는 허드슨 야드의 예술센터 더 셰드(The Shed). 나흘째 내리던 비가 그치고 마침내 파란 하늘을 드러낸 뉴욕의 날씨처럼 미술계를 휘감던 비관론은 잠시 사그라들었다. “올드머니에겐 지금이 진정한 기회다”라는 말이 페어장 곳곳에서 들렸다. 긴 줄을 서서 입장한 VIP들은 복도를 가득 메우며 활기찬 에너지를 더했다.
이번 프리즈 뉴욕에서 최고의 화제가 된 부스는 가고시안 갤러리였다. 출품작 중 가장 비싼 작품 중 하나로 알려진 제프 쿤스의 ‘헐크 (튜바스)’가 개장과 동시에 300만달러(약 42억원)에 팔려나갔다. 생존 작가 중 최고가 경매 기록(약 1300억원)을 가진 제프 쿤스의 조각 세 점을 단독으로 선보인 가고시안의 밀리센트 윌너 시니어 디렉터는 “쿤스의 개인 소장품에서 가져왔는데, 박람회가 예상보다 아주 순조롭게 출발했다”고 밝혔다.
이밖에 리자 루의 ‘Zeugma’(2024)가 22만 5000달러에, 조앤 스나이더의 ‘Float’(2015)가 21만달러에, 데이비드 살레의 ‘Bow Tie’ (2024)도 미국 컬렉터에게 13만달러에 낙찰됐다. 타데우스 로팍 갤러리가 선보인 게오르그 바젤리츠의 회화 ‘Motto’ 역시 100만유로에 판매됐다. 개장 1시간도 지나지 않아 부스 곳곳에서 판매 소식이 이어지며 박람회장은 열띤 대화로 시끌벅적했다. CNN의 간판 앵커 앤더슨 쿠퍼, 미식축구의 전설 조 몬태나, NFT아티스트 비플, 막스 홀라인 메트로폴리탄박물관 CEO 등 유명 인사들은 물론 30~40대 컬렉터들이 첫날 프리즈 뉴욕을 찾았다.
올해 프리즈 뉴욕의 참여 갤러리는 67개로 2019년(200개)에 비해 크게 줄었지만, 오히려 선택과 집중을 통해 방해 요소가 줄었다는 평가다. 프리즈가 헐리우드 미디어 거물인 아리 에마뉴엘에게 최종 매각된 직후 박람회가 열린 것도 현지에선 화제였다. 그는 과거 런던에서 시작된 프리즈의 글로벌 확장을 주도해온 인물로 앞으로 프리즈가 런던, 뉴욕, LA, 서울에 이어 더 적극적인 세력 확장에 나설 것이라는 예측이 나온다.
관세전쟁 속 ‘명성’ 지킨 테파프 뉴욕
뜨거운 에너지는 프리즈 다음 날인 8일 VIP에 공개된 테파프(TEFAF) 뉴욕으로 이어졌다. 테파프는 네덜란드 마스트리히트에서 1988년 시작된 명작 중심의 박물관급 아트페어. 뉴욕엔 2016년부터 대표적 부촌인 어퍼 이스트 지역의 역사적 건물 ‘파크 애비뉴 아모리’에 입성해 올해 11회째를 맞았다.
유럽박물관연합이 주최하는 이 행사는 기원 전 2세기 아폴로 조각상(20만달러), 기원 전 520년경 이집트 조각상(180만달러) 부터 피카소, 샤갈, 뭉크 등의 명작은 물론 다이아몬드, 하이엔드 공예와 가구 등을 선보인다. “7000년 미술사를 한 장소에서 선보인다”는 철학에 맞게 박물관과 미술관, 미술사학자와 딜러들이 한 자리에 모여 그야말로 미술계의 진정한 교류와 사교의 장임을 입증했다. 보라색 알리움 등 화려한 꽃으로 곳곳을 장식한 19세기 양식의 건축물이 수십 억대의 회화와 조각들과 어우러졌다. 굴껍질을 즉석에서 깐 뒤 샴페인과 함께 제공하는 케이터링 서비스 등 일반적인 아트페어와 다른 면모를 뽐냈다. 국내 갤러리 중엔 가나아트와 페이지갤러리가 참여했고, 뉴욕 기반의 한국계 갤러리인 티나 킴 갤러리가 주목 받았다.
전례 없는 경제적, 정치적 불확실성 속에 페어가 성공적으로 열린 것에 관람객들은 오히려 더 열광하는 분위기였다. 뉴욕의 한 아트 딜러는 “그 동안 테파프 뉴욕은 프리즈 뉴욕과 7~10일 간격을 두고 열렸는데, 올해는 컬렉터들의 분산을 막기 위해 하루 차이로 개막했다”며 “EU의 문화재 반출법과 국제 정세의 불안을 의식한 최선의 수였다”고 말했다. 리앤 자그티아니 테파프 뉴욕 디렉터는 “미국 정부의 관세 발표 이후 EU집행위원회와 잠재적 상호 관세 부과 대상에서 예술 작품을 제외하기 위해 법률가, 운송 업체 등과 긴밀히 소통해왔고, 90일간 유예 발표가 났다”며 “올해 기존 갤러리 78곳 외에 상파울루, 런던, 뉴욕 등 13개 갤러리가 새로 참여했다”고 했다.
1-54·NADA …부티크 아트페어 줄줄이
5월 뉴욕 아트위크엔 고가의 명작들만 있는 게 아니다. 미들급의 대안 박람회들도 각자의 개성을 드러냈다. 영국 런던, 모로코 마라케시와 함께 뉴욕에 10년 전 상륙한 아프리칸 아트페어 1-54는 레드훅, 할렘, 첼시 등 외곽을 떠돌다 올해 월가 인근 ‘원 체이스 맨해튼 플라자’에 입성했다. 아프리카 원주민과 아프리카 이주민 예술가들에 집중하며 독보적인 기획력을 자랑했다. 지난해 첫 선을 보인 ‘에스더 아트페어’는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에스토니아 난민들의 사교 장소였던 ‘보나르 에스토니안 하우스’에 터를 잡았다. 유럽, 일본, 발트해 연안 국가 미술관의 컬렉션과 함께 뉴욕 작가들의 작품을 지난 6일부터 닷새 간 선보였다.
젊은 갤러리와 작가, 큐레이터를 집중 조명하는 NADA(New Art Dealers Alliance)에는 19개국 50개 도시의 120개 갤러리와 비영리단체 등이 참여해 첼시 지역에서 화려하게 개최됐다. 이 지역에선 독립 예술가들을 위한 ‘클리오’도 11회째를 맞이했다. 250달러부터 2만5000달러까지 다양한 가격대의 작품들이 영 컬렉터들을 매혹했다. 뉴욕 도심에서 다리 건너 브루클린 지역에서도 아트페어가 열렸다. 8일부터 나흘간 온라인 갤러리 사치 아트가 주최하는 ‘아더 아트 페어’에는 총 125개 부스가 마련됐다. 100달러부터 1만달러까지 다양한 가격대의 작품을 만날 수 있었다.
뉴욕=김보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