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인간의 감정에 대한 보편적 언어다."
20세기 독일어권 최고의 시인으로 꼽히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이렇게 말했다. 체코에서 태어나 독일, 러시아, 프랑스 등지의 여러 예술가와 마음을 나눈 뒤 남긴 소회다. 언어나 문화가 달라도 예술이 주는 감동은 모든 장벽을 초월한다는 얘기다.
지금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선 조금 낯선 전시가 열리고 있다. 2025 한세예스24문화재단 국제문화교류전 '태국 현대미술-꿈과 사유'다. 태국의 현대미술가 24명의 작품 100점으로 동시대 태국을 돌아본다. 작가들의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기 어려울 정도로 생소하지만, 이들의 메시지는 오늘날 한국과도 공명한다.
이번 전시는 한세예스24문화재단이 선보인 일곱번째 국제문화교류전이다. 재단은 2015년 베트남을 시작으로 미얀마, 필리핀, 말레이시아 등 6개국의 기획전을 선보였다. 전시를 기획한 박일호 이화여대 명예교수는 "태국은 권역 내에서 유일하게 자주독립을 유지한 만큼 문화적 다양성을 잘 보존하고 있다"며 "동남아 미술을 이해하기 위한 시작점"이라고 강조했다.
1부는 신예들의 작품을 모아놓은 전시다. 태국은 주민의 95% 이상이 불교 신자인 만큼 신화와 종교를 주제로 한 작품이 많이 남아 있다. 전시된 신진 작가들의 작품에선 기존 관행을 해체하는 시도가 눈에 띈다. 불상에 우주복을 입히고, 비너스 조각상의 하반신을 결합하는 등 전통과 현대의 경계가 허물어진 모습이다.
거대한 정치 담론보단 삶의 내밀한 이야기를 건네는 작품이 대다수다. 어릴 적 할머니와의 추억을 추상적인 여성 인물화로 풀어낸 줄리 베이커 앤 서머의 회화가 그런 사례다. 생계를 위해 오토바이 운전일을 하며 건물 모퉁이를 촬영한 피차이 깨우위칫의 사진 작업도 나와 있다. 한국 청년세대도 공감할만한 대목이다.
2부는 사회 현안에 대한 중견 작가들의 사유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북부 산악지대부터 남부의 열대우림에 이르는 자연 파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그중 하나다. 절단된 침팬지 머리 형태의 조각이 전시장에 놓여 있다. 바닥에 드리운 그림자는 혈흔처럼 보이기도 한다. 작품을 만든 임하타이 쑤왓타나씬은 "동물원 홍보 모델로 착취당한 침팬지를 묘사한 작품"이라며 "인간과 자연의 균형이 무너지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저항적인 메시지를 던지는 작품에선 1970~1980년대 한국의 민중미술이 겹쳐 보인다. 신문을 활용한 러끄릿 띠라와닛의 설치작업이 단적인 예다. 가십 기사와 광고로 가득한 태국 신문 위에 '자유는 흉내 낼 수 없다'란 문장이 적혀있다. 비슷한 사례로 탓스나이 쎄타쎄리의 연작이 있다. 수많은 눈동자가 그려진 그림 앞에 힘없이 구겨진 신문 더미를 배치했다.
고통이 인간의 몫이라면 이를 표현하는 건 예술가의 역할이다. 비 타끙 팟타노팟은 오래전 앓았던 뇌종양을 작품에 그렸다. 투병 이후의 불교적 통찰을 담은 작품을 40여년째 선보이고 있다. 암세포처럼 보이는 캔버스의 붉은 원형 패턴은 이런 사연을 보면 달리 보인다. 생사의 갈림길에 선 작가가 윤회사상에 감명받아 피워낸 한 송이 꽃이다.
전시는 오는 20일까지.
안시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