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년 동안 가장 많이 상상해본 무대가 있었다면 오늘 무대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피아니스트 손열음(사진)이 지난 23일 저녁 서울 연세대 신촌캠퍼스에 있는 금호아트홀에서 이같이 말했다. 이날은 손열음이 고(故) 박성용 금호그룹 명예회장의 타계 20주기를 기리는 독주회를 마련한 날이었다.
박 회장은 1996년부터 금호문화재단 이사장직을 맡아 음악 영재 발굴 사업에 힘썼다. 2005년 타계했지만 그가 세운 재단은 피아니스트 손열음·김선욱·선우예권·조성진·임윤찬, 바이올리니스트 김봄소리, 첼리스트 고봉인 등 음악가를 발굴해냈다. 이날 공연은 음악가들이 박 회장과의 추억을 떠올리는 영상으로 시작했다. 바이올리니스트 김의명은 “음악을 사랑했고 넓은 안목으로 음악가들을 도울 모든 길을 생각했다”며 박 회장을 추억했다. 손열음도 “하늘에서 내리는 비처럼 모든 땅에 영양분을 심어주려 한 분”이라고 했다.
공연 1부는 손열음이 1998년 박 회장에게 처음 들려준 곡들과 2005년 고인을 마지막으로 만난 공연에서 연주한 작품으로 채워졌다. 서막은 슈만의 아베크 변주곡이었다. 슈만이 젊은 시절의 풋풋함을 담아낸 이 곡을 손열음은 음 하나하나 또렷이 살려가며 소리가 건반 위로 튀어 오르는 것처럼 연주했다. 초여름에 내린 빗방울이 지면에 부딪혀 ‘톡’ 터지듯 흩어지는 인상이었다.
다음 곡인 멘델스존의 ‘무언가’에선 소리가 찰랑거렸다. 많은 피아니스트가 역동성을 살리기 위해 음을 뭉개며 빠르게 휘몰아치곤 한다. 그러다 보니 어떤 음은 다음에 나올 절정을 표현하기 위한 조연에 그치기도 한다. 손열음의 손에서 나온 음들은 달랐다. 음 모두가 나름대로 존중받았다. 반찬의 짠맛에 맞추려는 공깃밥이 아니라 그 자체의 질감을 즐기게 하는 알 단테의 밥알처럼 음표들이 저마다 존재감을 드러냈다.
2부 작품은 슈만의 크라이슬레리아나였다. 손열음이 오늘날 박 회장에게 들려주고 싶어 한 곡이다.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처럼 피아니스트 개성이 잘 나타나는 작품이다. 장조와 단조를 오가며 뮤지컬 ‘지킬앤하이드’ 속 지킬 박사처럼 평온과 격정을 넘나들기도 한다. 손열음은 유연하게 속도를 조절하면서 감정을 충실히 전달했다. 때론 특정 음 하나를 콕 짚듯이 세게 치기도 했다. 하늘에 닿길 바라며 치는 종소리 같았다.
이주현 기자 dee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