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모폰’ ‘디아파종’ 석권한 임윤찬
반년만의 韓무대서 쇼팽 2번 협주곡
개성 드러내면서도 묵직한 정적 그려
파보 예르비·도이치 캄머필 내한 연주
20년 합 돋보이는 높은 감도의 섬세함
‘슬픈 왈츠’ 등 앙코르 2곡에 기립박수
침묵까지도 연주해낸 거장들의 밤이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피아니스트 임윤찬과 독일 브레멘의 정상급 악단 도이치 캄머필하모닉이 에스토니아 출신 마에스트로 파보 예르비의 지휘 아래 18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협연을 펼쳤다.
임윤찬은 올해 발매한 스튜디오 데뷔 음반 ‘쇼팽: 에튀드’(데카 레이블)로 최고 권위의 클래식 음반상을 휩쓸며 세계적 입지를 다졌다. 영국 그라모폰 뮤직 어워즈에서 피아노 부문과 젊은 음악가 부문 2관왕에 이어, 프랑스 디아파종 선정 ‘올해의 디아파종 황금상’에서도 ‘젊은 음악가’ 부문도 거머쥐었다. 미국 카네기홀에서의 독주회와 월드 투어, 스위스 베르비에 페스티벌과 영국 BBC 프롬스 데뷔, 미국 보스턴 심포니·LA 필하모닉 등과의 협연 등 전 세계를 누린 후 금의환향했다. 국내 무대는 지난 6월 리사이틀 이후 반년만이다.
선곡은 쇼팽 피아노 협주곡 2번. 우수에 찬 선율 위로 임윤찬 특유의 맑은 음색, 박자를 적당히 밀고 당기는 타건, 내달릴 듯한 속도감이 돋보였다. 예르비는 피아노 연주를 충실히 받쳐주면서도, 피아노와 오케스트라가 음악을 주고받는 부분에선 절묘하게 합을 맞추게 해 긴장감을 유지했다. 피아노가 격정적으로 마지막 건반을 내리치면 뒤에 조용히 깔려 있던 오케스트라가 서서히 음량을 높여 주제를 펼쳐냈다.
2악장에선 임윤찬의 섬세한 피아니즘을 엿볼 수 있었다. 아직 쇼팽이 10대 때 첫사랑을 떠올리며 작곡해 그 자체로 서정성이 깊고 호흡이 많은 곡이다. 열정적인 연주와 개성 있는 해석으로 주목받아온 임윤찬이 연주 중 빈 공간을 만들어내는 모습에는 숨 죽여 듣게 하는, 낯설면서도 묵직한 흡인력이 있었다. 이어 화려한 기교, 민속적 리듬으로 구성된 3악장에선 페달을 잘게 끊어 밟으며 활기차면서도 명료한 소리를 냈다. 호른, 바순 등 관악기와 어우러지는 음색도 듣기 좋았다.
음악에 몰입해 있는 임윤찬과 그렇지 않은 임윤찬 사이의 간극은 연신 관객들을 웃게 했다. 어색함을 감추지 못한 채 꾸벅꾸벅 허리를 숙이는 인사, 빠르게 입·퇴장하는 걸음걸이에 소년의 모습이 남아있었다. 앙코르로 들려준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 1번 아리아는 끊김없는 유려한 소리로 기립박수를 끌어냈다.
파보 예르비와 도이치 캄머필의 연주는 1부를 연 ‘돈 조반니’ 서곡, 2부의 모차르트 교향곡 41번 ‘주피터’, 앙코르까지 점점 더 진화했다. 2004년 이 악단의 예술감독으로 부임해 20년 내리 함께 한 신뢰는 음악에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악단은 마치 동기화된 듯 지휘자의 작은 들썩임에도 높은 감도로 반응해 소리를 조절했다. 100여 명에 달하는 대형 오케스트라에 비하면 40여 명 수준의 작은 규모임에도 울림은 더 컸다.
여느 때보다 크고 열광적인 환호가 쏟아진 것도 그래서다. 예르비는 앙코르로 시벨리우스의 ‘안단테 페스티보’와 ‘슬픈 왈츠’ 두 곡을 더 들려줬다. 특히 ‘슬픈 왈츠’는 가극 ‘쿠올레마’ 중 죽음을 묘사하는 여운이 긴 곡이다. 예르비는 피아니시시시시모(pppp·아주아주 여리게) 수준의 음색을 구현했고, 연주가 다 끝나고도 지휘봉을 내리지 않고 정적이 흐르게 뒀다. 마침내 지휘자 손이 내려간 순간, 대다수 관객이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기립박수를 보냈다. 뜨거운 환호에 연주자 모두 객석을 향해 허리 숙여 인사했고, ‘원더풀 사운드’라는 관객의 외침에 미소로 화답했다.
임윤찬과 파보 예르비, 도이치 캄머필은 21일 대전예술의전당, 22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전석 초대)에서도 같은 프로그램을 선보일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