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성 뒤의 이권… 미국의 중앙아메리카 군사개입엔 이유가 있었다[권오상의 전쟁으로 읽는 경제]

2 days ago 4

미국의 제국주의 ‘바나나 전쟁’
美, 1915년 아이티 점령해 군사개입… 버틀러는 아이티 무장투쟁 진압해
이는 美설탕회사 등 이권 위한 것… 버틀러 휘하 부대 온두라스에도 투입
美 바나나기업 지키려 군사작전 펴… 예편한 버틀러 “전쟁은 사기다” 고발

미국 해병대 장성 출신인 스메들리 버틀러는 미 명예훈장을 두 번 받은 전쟁 영웅에서 전역 후 반전 운동가로 돌아섰다. 1914년 미국이 멕시코 베라크루스를 점령한 당시 해병 소령이었던 버틀러(오른쪽에서 두 번째).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미국 해병대 장성 출신인 스메들리 버틀러는 미 명예훈장을 두 번 받은 전쟁 영웅에서 전역 후 반전 운동가로 돌아섰다. 1914년 미국이 멕시코 베라크루스를 점령한 당시 해병 소령이었던 버틀러(오른쪽에서 두 번째).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1915년 7월 28일, 미국 해병대 340명은 포르토프랭스에 상륙했다. 포르토프랭스는 쿠바 동남쪽의 섬 히스파니올라에 있는 국가인 아이티의 수도였다. 침공 부대의 사령관인 미국 해군 소장 윌리엄 캐퍼턴은 “점령은 평화와 질서를 재수립하는 임무”라는 당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메시지를 내놓았다. 이날 아이티군 병사 한 명이 항전하다가 사살됐다.》

미국 주도로 신설돼 버틀러가 직접 지휘하기도 했던 아이티 헌병대의 1920년경 모습.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미국 주도로 신설돼 버틀러가 직접 지휘하기도 했던 아이티 헌병대의 1920년경 모습.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권오상 프라이머사제파트너스 공동대표 ‘전쟁의 경제학’ 저자

권오상 프라이머사제파트너스 공동대표 ‘전쟁의 경제학’ 저자
미국은 포르토프랭스만 점령하지 않았다. 다음 달 미국에 고분고분한 인물인 필리프 수드레 다르티게나브를 아이티 대통령으로 만들고, 그 다음 달 미국 혼자 정한 조약을 내밀었다. 아이티 의회는 조약 비준을 처음엔 거부했지만 관세 수입을 모조리 압류하겠다는 캐퍼턴의 위협에 결국 굴복했다. 조약은 아이티 정부의 모든 결정을 무효로 만들 권한을 미국에 주고, 각 부 장관도 미국 해병대 장교가 맡도록 하며, 미국 해병 소령 스메들리 버틀러가 직접 통제하는 아이티 헌병대의 신설도 강제했다.

졸지에 나라를 뺏긴 아이티인들은 무장 저항을 개시했다. 그들은 스스로를 ‘카코스’라고 불렀다. 카코스는 히스파니올라에서만 사는 비단날개새로, 잘 숨는 것으로 유명했다.

아이티인과 미국인의 관계는 18세기 말에 시작됐다. 1776년 식민지 미국이 모국 영국을 상대로 독립전쟁을 시작하자 일부 아이티인은 미국 편에 서서 전쟁에 참가했다. 원래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히스파니올라 서부에 노예로 잡혀 온 아프리카계 아이티인들은 자신들을 자유로운 카코스에 빗대며 1791년 혁명을 일으켰다. 오랜 무장 투쟁 끝에 1804년 아이티는 마침내 독립을 쟁취했다. 노예를 부리던 미국은 흑인 노예가 세운 나라 아이티의 독립을 한동안 인정하지 않았다.

카코스의 게릴라전은 약 100년 전의 아이티 독립전쟁 때처럼 흘러가지 않았다. 버틀러가 지휘하는 미국 해병대는 카코스를 효과적으로 토벌했다. 특히 1915년 11월 카코스의 마지막 진지를 기습해 50여 명을 몰살할 때 버틀러 부대의 피해는 앞니 두 개가 부러진 부상자 한 명이 전부였다. 활약에 감명한 당시 미국 해군 차관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추천으로 버틀러는 미국 군인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영예인 명예훈장을 받았다.

버틀러에게 명예훈장은 낯설지 않았다. 이미 1914년 미국이 멕시코 베라크루스를 7개월간 무단으로 점령한 작전 때 한 번 받았기 때문이다. 즉 버틀러는 미국 해병 중 명예훈장을 두 개 받은 역대 단 두 명 중 한 사람이었다.

미국이 아이티를 침공하기로 결심한 데는 오늘날 씨티은행의 전신인 뉴욕씨티은행의 로비가 있었다. 1910년대 초반 뉴욕씨티은행은 아이티의 유일한 상업은행인 아이티공화국은행의 대주주가 됐다. 1914년부터 뉴욕씨티은행은 아이티 정부에 빌려준 돈을 못 받을 가능성이 커졌다며 아이티 점령을 요구했다. 미국의 또 다른 고려 사항은 아이티미국설탕회사였다. 아이티를 점령한 미국의 구체적인 목표 중 하나는 아이티 헌법의 개정이었다. 외국인의 토지 소유를 또 다른 노예제의 전초로 여긴 아이티인들은 건국할 때 외국인의 토지 소유를 금지하는 조문을 헌법에 명시했다. 이는 아이티미국설탕회사의 비즈니스 확장에 걸림돌이었다.

미국은 다르티게나브에게 외국인의 토지 소유를 허용하는 새로운 헌법을 내밀었다. 아이티 의회의 탄핵이 두려웠던 다르티게나브는 1916년 4월 의회를 해산했다. 새로 선출된 아이티 의회는 미국이 제시한 헌법 개정안을 즉시 기각했다. 1917년 다르티게나브는 다시 의회를 해산했다. 의회 해산 때마다 버틀러의 아이티 헌병대는 총부리를 들이댔다. 마침내 1918년 미국이 원하는 헌법이 통과됐다.

전장에서 버틀러가 세운 공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1903년 3월 버틀러는 휘하 부대와 함께 온두라스에 투입됐다. 버틀러의 부대가 투입된 표면적인 이유는 당시 온두라스 정계가 혼란스럽기 때문이었다. 1902년 10월에 치러진 대선에서 마누엘 보니야가 최다 득표했다. 그럼에도 임기가 끝난 대통령 테렌시오 시에라는 보니야가 도망자라는 이유로 권력 이양을 거부했다. 1903년 2월 온두라스 의회가 차점자인 후안 앙헬 아리아스를 대통령으로 선출하자 온두라스군 소장이었던 보니야는 곧바로 군사 반란을 일으켰다.

버틀러의 부대는 온두라스 정부군과 반군이 전투를 벌이던 트루히요에 나타났다. 그들이 어느 한쪽을 향해 총을 쏘지는 않았다. 이는 곧 반란을 일으킨 보니야를 승인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온두라스 정부군을 쉽게 무릎 꿇린 보니야는 1903년 4월 온두라스의 대통령이 됐다.

버틀러의 부대가 투입된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1899년에 생긴 유나이티드프루트는 중앙아메리카에서 바나나 사업을 하던 두 개의 미국 회사가 합병한 결과였다. 유나이티드프루트는 마치 스탠더드오일이 경쟁사의 공격적인 인수합병을 통해 미국 석유 시장을 독점한 것처럼 이후 14개의 비슷한 바나나 회사를 사들여 독점 체제를 구축했다. 미국이 군사 개입한 이유는 유나이티드프루트의 바나나 사업에 악영향이 있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대통령이 된 보니야는 유나이티드프루트에 통 큰 혜택을 안겼다.

유나이티드프루트의 온두라스 자회사 중 나중에 스탠더드프루트가 될 바카로 형제의 회사, 그리고 쿠야멜프루트라는 회사가 있었다. 1910년 온두라스 대통령 미겔 다빌라는 바카로 형제에게 철도를 건설할 독점권과 땅을 허락했다. 보니야 밑에서 부통령을 지냈던 다빌라 역시 전직 군인이었다.

쿠야멜프루트의 새무얼 제머레이는 권력 욕심이 여전하던 전직 대통령 보니야에게 접근했다. 미국인 용병 리 크리스마스의 부대와 무기 및 수송 수단을 제공하며 쿠데타를 부추겼다. 그 결과 1911년 온두라스에서 내란이 발발하자 미국은 다시 해병대를 파견했다. 1912년 다빌라는 도망가고 보니야가 다시 온두라스의 대통령이 됐다. 다빌라가 바카로 형제에게 허락했던 것 이상의 이권을 그 후 보니야가 쿠야멜프루트에 주었음은 물론이었다.

바나나 사업의 이권을 둘러싼 미국 회사 간 경쟁이 온두라스 정계를 뒤흔들 동안 버틀러는 온두라스와 무관했다. 버틀러는 1909년부터 1912년까지 온두라스의 남동쪽에 면한 니카라과에서 전투를 치렀다. 버틀러는 자기 부모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를 미치게 만드는 건 이 모든 혁명이 이곳에 무모한 투자를 한 미국인들에 의해 기획되고 재정적으로 지원된다는 점”이라고 썼다.

온두라스와 미국 바나나 회사들 간의 특별한 관계는 1862년에 태어난 한 미국인에 의해 널리 알려졌다.

텍사스의 은행에서 일하던 윌리엄 시드니 포터는 1896년 횡령 혐의로 체포됐다가 도주했다. 온두라스의 트루히요에서 도망자 생활을 하던 포터는 두고 온 아내가 병으로 죽어 간다는 소식을 듣고 6개월 만에 미국으로 돌아가 자수했다. 5개월 후 포터의 아내는 숨졌고 포터는 1901년까지 징역형을 살았다.

트루히요의 호텔에 숨어 지낼 때 포터는 일련의 소설을 썼다. 여기에는 ‘바나나 공화국’이란 표현이 나온다. 바로 온두라스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포터는 온두라스에서 썼던 소설을 1904년 ‘양배추와 왕들’이라는 단편집으로 출간했다. 그는 본명을 쓰지 않고 여러 필명을 사용했다. 그중 가장 많이 알려진 게 오 헨리였다. 즉 포터는 ‘마지막 잎새’와 ‘크리스마스 선물’을 쓴 작가였다.

스메들리 버틀러가 1935년 펴낸 ‘전쟁은 사기다’ 초판 표지.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스메들리 버틀러가 1935년 펴낸 ‘전쟁은 사기다’ 초판 표지.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1931년 해병 소장으로 예편한 버틀러는 1935년 책을 냈다. 그게 바로 “전쟁은 이익을 돈으로, 손실을 목숨으로 계산하는 부정한 돈벌이”라는 버틀러의 고해가 담긴 ‘전쟁은 사기다(War Is a Racket)’였다.

권오상 프라이머사제파트너스 공동대표 ‘전쟁의 경제학’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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