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속 10m 강풍이 불던 칸 극장선 '호프' 폭풍 몰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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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속 10m 강풍이 불던 칸 극장선 '호프' 폭풍 몰아쳤다

입력 : 2026.05.22 16:31

지난 17일(현지시간) 칸영화제 레드카펫에 오른 영화 '호프'의 배우들과 제작진. 왼쪽부터 배우 알리시아 비칸데르, 정호연, 테일러 러셀, 나홍진 감독, 마이클 패스벤더, 황정민, 조인성. AFP연합뉴스

지난 17일(현지시간) 칸영화제 레드카펫에 오른 영화 '호프'의 배우들과 제작진. 왼쪽부터 배우 알리시아 비칸데르, 정호연, 테일러 러셀, 나홍진 감독, 마이클 패스벤더, 황정민, 조인성. AFP연합뉴스

프랑스 언론 르 누벨 옵스(LE NOUVEL OBS)는 나홍진 감독의 올해 칸영화제 경쟁 부문 진출작 '호프'를 이렇게 평했다. "올해 칸영화제를 뒤흔든 지진 같은 작품." 이번 칸영화제는 예년에 비해 평이하거나 안전하다고 느껴지는 작품이 다수 공개돼 현지 참석자들의 아쉬움이 없지 않은데, 영화 '호프'가 이러한 침체를 완전히 깼기 때문이다. 프랑스 칸은 영화제 초반에 '초당 10m'에 달하는 강한 바람이 매섭게 불어댔고, '호프'는 이를테면 극장 안팎에 몰아친 강풍 같은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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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영화'의 기준이 쾌감과 충격에만 놓여 있다면 영화는 결국 감각의 전시장이 되고 말 테니 반드시 '관객을 몰아치는' 영화만이 우리에게 필요한 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잔잔한 분위기 속에서 '호프'는 2년 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아노라'급의 충격을 객석에 흩뿌렸고 수상 가능성도 조심스럽게 나오는 중이다. 하지만 '호프'의 경쟁작들이 약체인 것만은 아니다. 15일부터 19일(현지시간)까지 제79회 칸영화제 경쟁 부문(In Competition) 진출작 22편 중 13편을 관람한 기자가 올해 칸의 서사적 풍경을 복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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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프'는 나 감독의 전작 '추격자' '황해' '곡성'의 결을 따라가는 듯하다가 전혀 다른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괴물 같은 영화다. 이 영화에 나오는 괴생명체가 괴물이 아니라 이 영화 자체가 괴물이다. 미스터리로 시작하더니 SF와 액션과 공포로 이어지고, 다시 군사물과 자동차 추격전, 말 질주 장면이 뒤섞이다가 심지어 거대한 뭔가가 추락하면서 끝난다. 다 보고 나면 '지금 내가 뭘 본 건가' 싶어지는데, 이때의 객석 마음은 작중 폐허가 된 마을의 풍경과 다르지 않다. 혼돈 그 자체다.

그러면서도 시종일관 폭소가 가능한, 영화라는 예술이 다다를 수 있는 한계치를 목격했다는 느낌이 불가피해진다. 다음 장면이 궁금해 미칠 지경이 되는, 그래서 극장을 이탈하는 관객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칸영화제 관객들은 냉정해서 '아니다' 싶으면 상영 중에도 미련 없이 자리를 뜨며, 이건 결례가 아니다. 그러나 17일 뤼미에르 극장 본상영, 18일 아녜스 바르다 극장 재상영에서 두 차례 확인한 '호프'의 상영관 분위기는 달랐다. 중도 이탈하는 관객은 거의 보이지 않았고, 두 상영 모두 휘파람과 박수, 환호성 속에서 끝났다. '호프'의 수상 가능성이 조심스럽게 점쳐지며, 관건은 트로피의 색깔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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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해서 '호프'만이 걸작은 아니다. 안드레이 즈뱌긴체프의 '미노타우르스'는 걸작의 반열에 올려도 손색이 없을 작품이다. 불륜 서사인데, 단지 뻔한 치정극만은 아니다. 러시아의 성공한 사업가 글렙은 아내 갈리나가 포토그래퍼 안톤과 불륜 중임을 알게 된다. 처연하고 슬픈 감정이 몰려온 글렙은 안톤의 집을 무작정 찾아간다. 살의도 악의도 없는 방문이었지만, 안톤이 찍은 아내의 나체 사진을 보는 순간 화를 누르지 못하고 안톤을 죽인다.

글렙은 안톤의 시신을 강에 버리고 일상으로 돌아가려 하는데, 이 과정에서 글렙은 피해자로만 그려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러시아 정부로부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보낼 '징집 병력'을 회사에서 차출하라는 압박을 받고 있어서다. 그는 전장에 보내질 사원들의 목숨이 아니라 병력 차출에 따른 회사 손실을 걱정하는 인물이다. 이 영화는 러시아의 '도덕적 파산'을 그리스신화 속 미노타우로스와 연결시키는데, 신화에서 미궁 속 미노타우로스에게 '인간 제물 14명'을 바친 것과 러시아 병력 14명 차출은 등가를 이룬다. 겉으론 '사랑과 전쟁'의 에피소드에도 못 미치는 불륜극이지만 비유와 상징, 그리고 서스펜스가 강렬해 현지에서 찬사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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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베우 파블리코프스키의 '파더랜드'는 영화제 초반부터 극호평을 받으며 다른 영화들을 기선제압한 작품이다. 올해 2월엔 베를린영화제에서 영화 '로즈'로 은곰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고, 최근 한국에서도 개봉한 SF영화 '프로젝트 헤일메리', 그리고 '추락의 해부'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주연이었던 잔드라 휠러의 신작이다.

이 영화는 소설 '마의 산'을 집필한 노벨문학상 수상자 토마스 만과 그의 딸 에리카 만의 독일 기행을 다루는데, 아버지 만은 서독 프랑크푸르트와 동독 바이마르에서 문호 괴테와 관련된 메달을 동시에 수상하려 한다. 그것이 '두 조국'의 부름에 응하는 길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또 그는 '정치보다 큰 예술'을 추구했다. 하지만 휠러가 연기한 에리카 만의 남동생 클라우스 만의 자살 소식이 들려온다. 그러나 토마스 만은 이미 내놓은 자식이란 이유로 수상 여정을 멈추지 않으려 한다. 이 영화는 '정치와 무관한 예술은 과연 가능한지' '이념과 정치가 개인을 뛰어넘을 수 있는지'를 질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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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생 '젊은 거장'으로 평가받는 하마구치 류스케의 '올 오브 어 서든'도 현지에서 호평이 쏟아졌다. 파리 근교 요양원 책임자인 마리루에 관한 이야기로, 그는 요양원의 노인을 그저 신체적으로 노쇠한 대상이 아닌 '인간 그 자체'로 대하려 한다. 하지만 간호사들은 인력 부족과 고강도 노동에 따른 피로를 호소하고 위에선 그를 해고하려고 한다. 마리루는 연극 연출가이자 암환자인 일본인 마리를 만나면서 삶의 행보를 다시 쓰게 된다. '드라이브 마이 카'의 관객이라면 왜 이 영화가 3시간의 상영시간을 필요로 했는지를 예감하게 될 것이다.

제임스 그레이의 '페이퍼 타이거'는 대중 관객에게 익숙한 문법으로 채워졌으면서도 영화가 끝난 뒤 더 깊은 사유를 가능하게 해주는 영화다. 성실한 엔지니어이자 한 집안의 가장인 어윈은 뉴욕경찰 출신인 형 게리에게 동업 제안을 받고 러시아 마피아가 장악한 신흥 마피아 조직과 손을 잡기로 한다. 사업이 성공하면 앞으로 돈 걱정은 안 하고 살게 되리라고 믿었지만, 그의 선택은 오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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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피아 조직은 예산만 탐냈을 뿐 사업 수행에는 의지가 없었다. 어윈과 게리는 함정에 걸려들었음을 간파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고, 마피아 조직원들은 어윈의 집에 찾아와 위협을 가한다. '우리가 단단하다고 믿었던 모든 것들은 얼마나 허상인가'란 질문을 남기는 영화다. 이 영화는 '결혼 이야기'에서 부부로 나왔던 애덤 드라이버와 스칼릿 조핸슨의 7년 만의 재회로도 화제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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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나테 레인스베가 주연으로 참여한 크리스티안 문지우의 '피오르드'는 공권력에 의해 파멸되는 한 가족을 다룬다. 남편 게오르기우와 아내 리스벳는 다섯 아이를 둔 부부로, 루마니아에 거주하다가 아내의 고향인 노르웨이의 외딴 마을로 이주했다. 일곱 식구는 마을 주민들과 빠르게 친해지지만, 장녀 엘리아의 몸에서 멍 자국이 발견되면서 상황이 돌변한다. 수사관이 갑자기 들이닥쳐 "물어볼 때만 답하라"며 무거운 표정을 짓고, 심지어 아이들과 부모를 분리시킨다. 그들은 이미 아동학대범으로 몰린 것. '피오르드'는 '아이의 체벌은 어디까지 정당화될 수 있는가'를 질문하는 영화가 아니라 '공권력은 개인의 삶에 어디까지 침투할 수 있는가'를 묻고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신작으로 큰 관심을 모았던 '상자 속의 양'은 휴머노이드 인공지능(AI) 아동 로봇을 '구매'한 한 가족의 이야기다. 2년 전 7세 아들 가케루를 떠나보낸 오토네와 겐스케 부부는 가케루와 똑같이 생긴 휴머노이드 로봇을 집으로 들인다. 일본에만 무려 3000명의, 아니 3000'대'의 AI 휴머노이드 로봇 아이가 작동 중이었다. 로봇 가케루를 아들처럼 대하려 하는 엄마 오토네와, 그저 가전제품 취급하는 아빠 겐스케는 로봇 가케루 사이에서 갈등한다. 하지만 로봇 가케루는 두 사람 외에 다른 휴머노이드 로봇과 소통 중이었다. 이 비밀이 밝혀지면서 이들 가족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 속으로 빠져들어 간다.

마리 크로이처의 '젠틀 몬스터'는 평범한 남편이 실은 아동 성착취물 동영상 유포범이었다는 걸 알게 된 아내 루시를 다룬다. 가장 사랑하던 사람이 실제로는 '괴물'이라는 걸 알게 됐을 때 사람은 어떤 상황에 직면하는가를 묻는다. 경찰이 집을 방문하면서 평화는 무너진다. 그런데 영화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영화는 필립의 성착취물 사건을 수사하는 수사관 엘사의 모순까지 조명해낸다. 엘사의 부친은 노쇠한 상태로 간병인을 두고 있었는데, 엘사는 아버지가 간병인에게 저지르는 부정한 짓을 외면해왔다. 제목이 말하는 '젠틀 몬스터'는 한 남자 개인뿐만 아니라 침묵했던 사회 시스템 전체일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이 밖에도 하비에르 바르뎀 주연의 '빌러비드', 알코올중독에 빠진 배우의 망가진 삶을 다룬 '어나더 데이',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신작 '비터 크리스마스', 정권에 저항하며 프랑스의 고유한 정신을 되새긴 '물랭' 등도 수상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올해 칸영화제 수상 결과는 24일 새벽(한국시간) 발표된다.

[칸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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