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대개는 가장 먼저 육군훈련소의 서슬 퍼런 연병장이나 논산 딸기의 달콤한 향기를 떠올린다. 하지만 논산에는 우리가 미처 몰랐던, 조금 더 느리고 다정한 공간이 숨어있다. 훈련소의 명령과 규율이 지배하는 긴장된 공기에서 차로 10여 분만 벗어나면, 시간이 멈춘 듯한 평화로운 풍경이 우리를 맞이한다. 그곳에 연산역과 그 곁을 지키는 붉은 벽돌의 ‘연산문화창고’가 있다.
연산역은 이제 하루에 몇 번 기차가 서지 않는 작은 역이지만, 여전히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만남의 장소다. 이곳이 특별한 이유는 기차를 직접 보고 만질 수 있는 철도 체험 공간 덕분이다.
멈춰 선 기차 안에서 아이들은 일일 기관사가 되어보기도 하고, 철길을 따라 걷는 경험을 통해 기차가 주는 특유의 정취에 젖어든다. 이 연산역 철길에서 느낀 근대적 정서는 불과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연산문화창고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역의 철도 문화와 1960년대 농협 쌀 창고라는 산업 유산이 하나의 동선으로 묶여 흐르는 구조다.
연산문화창고는 2017년 충남 균형발전사업과 2019년 문체부 유휴시설 문화재생사업에 선정되며 본격적인 ‘쓸모’를 찾기 시작했다. 1960년대 지어진 농협 쌀 창고 5동을 활용한 이 프로젝트는 창고를 허물고 새로 짓는 방식 대신, 벽돌의 흔적을 보존하며 내부를 현대적으로 고쳐 쓴 리모델링을 택했다. 현재 총 6개의 동(6동은 신축)이 유기적으로 운영 중인데, 각 공간은 명확한 테마를 가진다. 1동 ‘담쟁이 예술학교’는 창의 활동 공간으로 쓰이며, 2동 커뮤니티홀은 공유 주방과 수제 맥주 공방을 갖췄다.
3동의 대형 카페는 웅장한 층고를 살려 방문객에게 개방감을 선사한다. 카페 앞마당에 조성된 물놀이장은 부모가 카페 안에서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지켜보며 안심하고 쉴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이는 도심의 규격화된 놀이터와는 차별화된 공간적 해방감을 제공한다.
특히 인상적인 곳은 과거 창고의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5동 구역이다. 이곳은 로컬 마켓인 ‘알곡 상점’과 스마트팜으로 활용되는데, 과거에 수확한 쌀을 저장하던 공간이 이제는 미래지향적 농업의 비전을 제시하는 생산 기지로 변모했다는 점은 방문객들에게 과거와 미래가 교차하는 경험을 전달한다. 식량을 보관하던 창고의 본질적인 기능을 가장 현대적인 방식으로 계승하며 공간의 정체성을 이어가고 있다.
현재 4동 다목적홀에서 열리는 ‘한국 현대미술 거장전’은 2026년 3월까지 진행된다. 김환기, 박서보, 이우환, 천경자 등 한국 미술사의 거장 10인의 작품을 한자리에 모았다. 이번 전시는 판화, 사후 판화, 아트 포스터라는 세 가지 제작 방식을 동시에 선보이며 관람의 재미를 높였다.
작가가 생전에 직접 사인한 ‘오리지널 판화’의 에디션 넘버와 작가 사후에 재단에서 제작하여 압인이나 직인을 찍은 ‘사후 판화’를 직접 비교해 보는 과정은 마치 숨은그림찾기와 같은 즐거움을 준다. 관람 후에는 6동 오감놀이터에서 거장들의 도안에 색을 입히거나 도장 판화를 직접 파보는 체험이 가능하다.
이러한 콘텐츠의 힘은 방문객 수로 증명된다. 평일에는 100여 명, 주말에는 2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다. 주목할 점은 관람객의 거주지다. 논산 시민뿐만 아니라 대전, 세종, 멀리는 서울에서까지 일부러 연산읍을 방문한다. 이는 고령화로 정적이었던 농촌 마을에 활기를 불어넣고, 외부 인구를 유입시키는 문화 거점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연산문화창고가 제시하는 인구 소멸 시대의 대안은 '기획의 힘'과 '관계 인구의 형성'에 있다. 단순히 건물을 재생한 것을 넘어, 지역 주민들이 기획 단계부터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연산 마켓' 등을 통해 지역 농산물과 문화를 결합하는 소프트웨어 중심의 재생을 택했다. 이러한 시도는 외지인들이 단순히 스쳐 지나가는 관광객에 머물지 않고, 지역의 고유한 가치를 소비하며 정기적으로 방문하게 만드는 선순환 구조를 만든다. 인구 소멸이라는 위기 앞에서 물리적 개발보다 주민의 삶과 수준 높은 예술 콘텐츠를 채워 넣는 방식이 농촌의 자생력을 어떻게 되살릴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모델이다.
쌀이 우리 몸의 배고픔을 채워주던 시절을 지나, 이제 연산문화창고는 예술과 휴식이라는 콘텐츠로 지역의 활력을 저장하고 있다. 훈련소의 딱딱한 이미지 너머, 연산역 철길에서 시작된 발걸음이 낡은 창고 안 거장들의 작품으로 이어지는 풍경은 멈춰 있던 공간이 어떻게 지역의 새로운 심장이 될 수 있는지를 여실히 증명한다. 이번 주말, 낡은 벽돌 사이로 흐르는 거장의 숨결과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공존하는 연산으로의 짧은 여행을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
최영식 칼럼니스트

6 hours ago
2






![김준수 "생전 처음 관객 앞 욕설…'비틀쥬스', 도전정신 있었죠" [인터뷰+]](https://img.hankyung.com/photo/202602/01.43395652.1.jpg)
![직각 어깨·부풀린 치마…럭셔리 패션, 건축을 입다 [박연미의 럭셔리 오딧세이]](https://img.hankyung.com/photo/202601/01.42948328.1.jpg)







.jpg)

English (U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