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차례 경매가 지나간 위판장 물기 어린 바닥에 주홍빛 집게다리 하나 뒹군다. 대게잡이 어선에 가득 실려 온 어느 붉은대게(홍게)에서 떨어져 나왔나 보다. 8개 다리 모두 살로 통통하고 꽉 들어찬 내장으로 몸통이 단단한 것들은 이미 상품(上品)으로 팔려 떠났다. 아침 댓바람에 부두로 들어온 배는 두 척뿐. 울진대게를 싣고 오지는 않았다. 7일 경북 울진군 후포항(港). 바람이 거셌다.
● 울진대게 ‘독립선언’
경매는 빨랐다. 배에서 부린 붉은대게들을 중년 여성 두 명이 크기는 어떤지, 얼마나 실한지, 다리는 제대로 달렸는지, 색은 선명한지 등에 따라 5열 종대로 죽 늘어놓는다. 경매사와 중도매인들이 빙 둘러서더니 몇 초 만에 한두 줄씩 흥정을 끝낸다. 다 마치는 데에 1분 안팎. 다음 5열 종대로 이동한다.
울진대게는 과거 영덕대게로 불렸다. 울진 앞바다 대륙붕인 왕돌초(왕돌잠, 왕돌짬) 일대에서 주로 잡지만 내륙에서 거래상들이 오는 게 여의치 않아, 교통이 편리한 영덕군 강구항에서 주로 거래됐기 때문이다. ‘등허리 긁을 때 손 닿지 않는 곳이 울진’이라는 농담이 괜히 생긴 게 아니다.울진이 ‘명칭 독립’에 나선 것은 1995년 첫 지방자치단체장 선거가 치러지고 나서다. 첫 민간 군수가 대게 논쟁을 일으켰다. 그 결과 울진은 울진대게, 영덕은 영덕대게로 각각 부르기로 했다. 이 과정에서 ‘자해(紫蟹)는 울진 특산물’ ‘울진은 해포(蟹浦·게의 항구)’ 하는 옛 기록들이 소환됐다. 자해는 말 그대로 붉은빛 도는 게다.
● 고립이 가져온 풍요… 금강송과 송이
내륙과의 연결이 어려워 울진대게는 한동안 제 이름을 찾지 못했지만, 고립은 풍요를 부르기도 한다. 울진이 자랑하는 금강소나무가 그렇다. 금강송면 소광리와 북면 두천리를 연결하는 산림이 금강소나무 군락지다. 금강송면은 2015년 서면에서 아예 이름을 바꿨다.
이 군락지는 조선 시대부터 왕명으로 벌채를 금지하는 봉산(封山)이었다. 금강소나무의 옛 이름 황장목(黃腸木)을 붙여 황장봉산이라 했다. 왕궁이나 재궁(梓宮·왕가의 관)을 짓기 위해 벨 때는 “어명이오”라고 먼저 외쳤다고 한다.
그렇게 버텨 울창(鬱蒼)해진 소나무가 지역민들에게 선사한 진보(珍寶·진귀한 보배)가 송이버섯이다. 1970년 일본인들이 그 맛을 알고 찾기 전까지 찬거리에 불과하던 것이 효자가 됐다. 송이는 15~60년 된 젊은 소나무에서만 자란다. 여전히 인공 재배는 불가능하다. 온전히 그해 기후와 소나무에 달렸다.
‘기후변화로 고사한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오는 600년 된 대왕소나무가 있는 이 군락지에 자신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는 시설 ‘금강송 에코리움’이 있다. 금강송 숲길을 걷고 요가와 명상에 빠진다. 금강소나무와 송이 이야기를 듣는다. 소나무 향기 은은한 숙소에는 TV가 없다. 제공되는 식사에도 고기반찬은 뺐다. 숙박 정보는 ‘야놀자’ 앱에서 자세히 찾아볼 수 있단다. 흥미롭다.
● 염화미소 불영사
금강소나무 군락지가 이어지는 하원리에 불영사(佛影寺)가 있다. ‘천축산(天竺山)불영사’라고 적힌 일주문에서부터 가람(伽藍)까지는 약 1km 흙길이다. 도중 ‘丹霞洞天(단하동천)’이라고 음각된 암벽을 볼 수 있다. 도교에서 동천은 신선이 사는 곳이다. 상서로운 붉은 기운 감도는 낙원쯤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651년 의상대사가 지었다는 전언이 기록으로 전해지지만, 사실과는 다른 듯하다. 의상이 태백산을 중심으로 창건한 화엄종 세력이 퍼지면서 생긴 사찰 같다는 해석이 일리가 있다(‘문헌 속 울진 불영사 上’, 최선일 여학 심현용 편, 온샘, 2021).
● 우리에게 다가오는 울진
울진 가는 길이 지난달부터 훨씬 수월해졌다. 강원도 강릉에서 부산까지 잇는 철도 동해선이 개통해서다. 그전까지 수도권에서 울진을 가려면 차를 몰고 가거나, 강릉 속초 등지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내려가야 했다. 이제는 강릉까지 KTX로 가서 열차를 갈아타면 2시간 안에 도착한다. 내려갈 때 왼쪽 차창 밖으로 보이는 쪽빛 동해는 덤이다.
울진은 그동안 동해를 바라보는 장소였다. 하지만 이제는 시선을 돌리고 있다. 고립되다시피 한 울진이 우리에게 점점 더 다가오고 있다. 가득한(鬱) 보배(珍)를 품에 안고서.
글·사진 울진=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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