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에 울적해질 때마다 나는 히스로공항을 떠올리곤 한다.” 2003년 개봉한 영화 ‘러브 액츄얼리’는 영화배우 휴 그랜트가 읊는 ‘영국의 관문’에 얽힌 독백으로 시작한다. 영화 속 공항은 수많은 비행기가 뜨고 내리고, 승객이 오가는 단순한 물리적 공간이 아니다. 사랑과 행복이 교차하는 감정적 장소로 새롭게 그려진다.
현실에서도 공항은 방문국의 첫인상을 결정하는 감성적 공간이다. 비행기에서 내렸을 때 전해지는 독특한 체취, 입국심사원이 미소와 함께 건넨 인사에 사르르 녹아내린 긴장감 등의 경험은 만국공통이다. 예상보다 캐리어를 빨리 찾았을 때의 소소한 즐거움이 유명 관광지에서 찍은 기념사진보다 더 오래 뇌리에 남기도 한다.
반대로 결항과 지연에 발목이 잡히면 여행을 둘러싼 기억에 통째로 먹구름이 낀다. 작가 알랭 드 보통은 히스로공항에서의 상주 경험을 담은 <공항에서 일주일을>에서 “나는 내 비행기가 늦어지기를 갈망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더 공항에서 뭉그적거릴 수 있으니까”라고 공항을 향한 무조건적인 애착을 드러냈다. 하지만 범인이 지연·결항 정보가 가득한 안내판 앞에서 진정하기는 쉽지 않다. 사업 스케줄에 차질이 빚어지고, 매서워질 직장 상사의 눈초리 걱정에 발만 동동 구를 뿐이다.
세계인의 감성과 일상이 교차하는 유럽 최대인 런던 히스로공항이 지난 21일 화재에 따른 정전으로 하루 동안 전면 폐쇄됐다. 그제 저녁부터 운항이 부분적으로 재개됐다지만 항공편 1300여 건이 취소·변경된 후폭풍이 상당하다. 29만 명 이상의 발이 묶였다. 전 세계로 흩어진 승무원과 고객·물류 재조정에도 어려움이 적잖다.
히스로공항은 지난해 이용객이 8386만 명에 달했다. 84개국 214개 목적지로 89개 항공사가 취항하고 있다. 국제선 이용객은 두바이공항에 이어 세계 두 번째다. 첨단 시설과 재난 방지 계획을 갖췄다는 글로벌 교통·물류 허브도 예상 밖 인근 변전소 화재로 발이 묶였다. 바다 건너 일로만 봐선 안 된다. 공항 등 사회기반시설 점검에 다시 한번 눈길을 돌릴 때다.
김동욱 논설위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