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시곗바늘과 맞물려 움직여 온 인류의 역사

10 hours ago 2

최초의 시계는 4만4000년 전… 원숭이 뼈에 새겨진 29개의 홈
1차 세계대전 등 전쟁 거치며 손목시계-야광시계 탄생하기도
英 시계학 박사 학위 받은 저자… 제작경험 바탕으로 시계사 소개
◇시계의 시간/레베카 스트러더스 지음·김희정 옮김/400쪽·2만2000원·생각의힘

시계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영국 수공예 시계 제작자가 개코원숭이 뼈로 시간을 측정한 4만4000년 전 유물부터 롤렉스의 탄생에 이르기까지 시계 역사의 중요한 순간을 펼쳐 보인다. 사진은 저자인 레베카 스트러더스. ⓒAndy Pilsbury·생각의힘 제공

시계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영국 수공예 시계 제작자가 개코원숭이 뼈로 시간을 측정한 4만4000년 전 유물부터 롤렉스의 탄생에 이르기까지 시계 역사의 중요한 순간을 펼쳐 보인다. 사진은 저자인 레베카 스트러더스. ⓒAndy Pilsbury·생각의힘 제공

전쟁은 수많은 발명을 낳았다. 손목시계도 그중 하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호 속에서 젊은 군인들이 연인이 준 회중시계를 손목에 감던 게 오늘날 손목시계의 시초다. 어두운 참호 속에서 시간을 읽을 수 있도록 문자판에 라듐 페인트를 칠한 야광시계도 이때 나왔다. 여성 직공들은 라듐 가루를 온몸에 뒤집어쓰고 일했다. 라듐은 시한폭탄처럼 뼈를 갉아먹었고 많은 이들이 라듐 중독으로 죽었다. 전쟁의 아픈 뒷모습이었다.

영국 최초로 시계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수공예 시계 제작자가 쓴 책이다. 시계가 처음 탄생했을 때부터 현재까지 시계 역사의 중요한 순간을 다뤘다. 시계가 소수 엘리트만을 위한 신분의 상징에서 보편적 도구로, 그리고 다시 신분의 상징으로 변신한 변천사를 읽다 보면 새삼 몰취향한 스마트폰 시계 대신 ‘째깍째깍’ 움직이는 손목시계를 차고 싶어진다.

인간이 최초로 시간을 측정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추측되는 유물은 남아공 ‘국경 동굴’에서 발견됐다. 약 4만4000년 전 만들어진 유물로, 검지 길이 정도 되는 개코원숭이 종아리뼈에 29개의 홈을 새겨놨다. 만약 그 뼈의 주인이 홈과 칸을 번갈아 사용해서 날짜를 셌다면 평균 29.5일이 되니 정확하게 음력 한 달을 계산한 셈이 된다. 고고학계에서는 생식 주기, 임신 주기를 계산하기 위해 이 뼈를 사용했다는 추측도 나온다. 책 속엔 이처럼 흥미로운 시계사(史)가 가득하다.

현직 시계 제작자인 저자의 경험도 곳곳에 녹아 있어 몰입감을 높인다. 저자는 남편과 함께 부품 제작부터 모든 공정을 수작업으로 진행하는, 영국에 몇 남지 않은 시계 제작 공방을 운영 중이다. 지난 500년 동안 만들어진 골동품 시계를 수리할 수 있는 기술도 보유하고 있다. 로버트 스콧이 1912년 남극 탐험에 가져간 회중시계가 그의 작업대에 올라오기도 한다. 인류 탐험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시계 앞에서 숭고함을 느끼는 저자의 모습이 인상 깊다.

엄지손톱만 한 세계에 평생을 바치는 수공예 시계 제작자들은 너무 집중한 나머지 눈이 건조해지기 일쑤다. 공방 바닥에 납작 엎드려 실수로 튀어 나간 부품을 찾아 헤매는 ‘부품 사냥’도 일상이다. 누군가는 질문할 수 있다. 컴퓨터로 디자인을 입력하고 소프트웨어로 기계를 제어하면 대부분의 제작 공정을 대신할 수 있는 시대에 왜 한물간 방식으로 구닥다리 장치를 만드느냐고. 이들에게 저자는 “(컴퓨터로 만들면) 재미가 없잖아요?”라고 답한다. 손을 더럽혀 가며 무언가를 만들고 작은 부품을 만지작거려 작동하게 하는 일을 사랑한다고 말이다.

인간의 손으로 만든 시계는 인공지능(AI)과 정확히 반대 지점에 존재한다. 세계인이 공유하는 무작위 데이터 더미가 아니라 독자적인 개성과 인격을 지닌 장인의 손에서 몇 년의 세월도 감수하며 탄생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저자는 눈을 가리고도 기계가 만든 시계와 손으로 만든 시계를 구분할 수 있다고 한다. “진정한 지각을 지닌 AI가 나오기 전까지는 수제 시계에서 느껴지는 차이를 흉내 낼 수 없을 것”이란 말에서 자부심이 느껴진다.

저자는 어느 집안에서 18세기부터 가보로 내려온 시계를 정비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 시계를 만지며 자신이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연결하는 다리가 되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만들어졌고, 내가 사라진 후에도 몇백 년은 더 존재할 물건의 역사에서 나 또한 하나의 장이라는 생각을 하며 앞서간 선배들이 남긴 삶의 흔적을 주워 모은다.”

시계의 역사뿐 아니라 자신의 일에 대한 지극한 자부심도 함께 배울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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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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