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 설비만 있으면 할 수 있는 저부가가치 산업.’
2000년께 시작된 디지털 혁명 이후 20년 넘게 이어진 하드웨어(HW) 산업에 대한 평가다. 구글 등 소프트웨어(SW) 경쟁력을 앞세운 빅테크가 산업 혁신을 주도하면서 HW 저평가 경향은 더욱 심해졌다. 엔지니어 연봉부터 기업가치(시가총액)까지 HW 기업은 SW 기업을 넘보지 못했다. 하지만 최근 인공지능(AI)산업 고도화로 ‘SW 중심 시대’가 흔들리고 있다. 반도체, 서버, 전력기기 등을 영위하는 HW 기업이 SW 기업을 제치고 AI 시대의 주역으로 떠오르는 ‘파워 시프트’가 본격화한 것이다.
◇AI 인프라 기업 각광
HW의 약진은 올해 실적 전망치에서 확인된다. 27일 블룸버그에 따르면 올해 세계에서 가장 많은 영업이익을 기록할 것으로 예상되는 기업은 AI 인프라의 핵심 부품으로 떠오른 고성능 메모리칩을 제조하는 삼성전자(전망치 1795억8000만달러)다.
SK하이닉스(3위·1294억달러) TSMC(10위·807억1000만달러) 마이크론(11위·672억9000만달러) 브로드컴(12위·552억8000만달러) 등 HW 기업 5곳의 영업이익 전망치가 500억달러를 넘어섰다. 2020~2022년만 해도 글로벌 영업이익 상위 10개 기업 명단에 들어간 전통 HW 기업은 삼성전자와 도요타뿐이었다.
SW·HW 기업 간 주가 흐름도 차별화되고 있다. 구글 마이크로소프트(MS) 아마존 메타 등 SW 중심 4대 빅테크는 올 들어 지난 26일까지 -14~24.2%의 주가 등락률을 나타냈다. SW 신흥 주자로 꼽히는 데이터 분석·서비스 업체 팰런티어 주가는 같은 기간 23.2% 떨어졌다.
반면 ‘메모리 빅3’인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마이크론은 같은 기간 주가가 149.4~215.2% 올랐다. 빅3는 이달 들어 전 세계 14곳뿐인 ‘시가총액 1조달러 클럽’에 이름을 올렸다. 데이터센터의 핵심 장비 서버를 생산하는 델은 142.4% 상승했고, 전력 설비 업체 버티브도 99.9% 올랐다.
이 같은 흐름은 AI 인프라 구축이 세계 산업의 최대 화두로 떠오른 데 따른 것이다. 4대 빅테크는 올 한 해에만 6740억달러(약 1010조원)에 달하는 투자금 대부분을 AI 인프라 구축에 쏟아붓는다.
시장조사업체 옴디아는 2026년 글로벌 반도체산업 매출의 전년 대비 증가율 전망치를 기존 30.7%에서 62.7%로 32%포인트 올렸다. AI 반도체 매출은 7000억달러(약 1049조원)로 전년 대비 90% 증가할 것으로 내다봤다.
팰런티어와 세일즈포스 같은 SW 기업은 ‘AI에 대체될 수 있다’는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 실리콘밸리의 한 엔지니어는 “SW 엔지니어 채용은 사실상 중단된 상태”라며 “반도체, 전력 설비 같은 HW 엔지니어 수요는 꾸준히 늘고 있다”고 전했다.
◇“무게중심 이동, 구조적 변화”
HW 강세는 앞으로도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빅테크 사이에서 AI 경쟁력에 따라 승자와 패자가 가려지겠지만, 소비자에게 AI 서비스를 제공하는 인프라를 닦기 위한 HW 투자는 지속될 수밖에 없어서다.
골드만삭스 전략 담당 조직 GSGI의 조지 리 공동 대표는 “AI 투자는 데이터센터, 전력, 냉각, 케이블, 서버랙까지 광범위한 인프라에 퍼져 있다”며 “AI 투자액이 2026년 7650억달러에서 2031년 1조6000억달러까지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HW의 부상을 기술사회학 개념인 ‘리버스 세일리언트’(역돌출부) 현상으로 해석하는 전문가도 있다. 잠깐 유행하는 게 아니라 HW가 AI SW를 따라가는 산업 전반의 균형 조정 과정이라는 의미다. 김상배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는 “AI 산업의 경쟁은 더 이상 SW나 모델 성능에서 끝나지 않는다”며 “AI 모델이 고도화될수록 막대한 전력과 반도체, 서버, 냉각 설비, 데이터센터가 필요해지면서 산업의 병목이 인프라 영역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SW는 투자 비중도 낮아져
최근엔 온디바이스 AI 바람을 타고 로봇, 자율주행차 등과 관련한 HW 기업의 재평가 움직임이 확대되고 있다. 유니트리 등 중국 로봇 기업은 투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기업공개(IPO)를 추진 중이다. 실리콘밸리 벤처캐피털 대표는 “AI를 파는 기업보다 AI를 짓는 기업이 주목받고 있다”며 “AI HW의 주목도는 인프라에서 온디바이스 AI로 옮겨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기관투자가도 HW 비중 높이기에 나섰다.
골드만삭스는 지난 25일 보고서를 통해 “헤지펀드의 롱(매수) 포트폴리오에서 반도체 섹터가 차지하는 비중은 역대 최고치를, SW 섹터 비중은 2019년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고 밝혔다. 헤지펀드들은 HW 기업 중에서도 미국 램리서치와 어플라이드머티어리얼스, 네덜란드 ASML 같은 세계적 반도체 장비 기업을 순매수하며 비중을 늘린 것으로 알려졌다.
황정수/김동현/이혜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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