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주하는 'F1:더 무비'…애플은 진짜 영화판을 뒤집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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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은 죽었다”고 외치던 사람들은 어쩌면 피노키오가 될지도 모른다. 첨단으로 혁신을 일군 애플이 직접 제작과 투자, 배급까지 맡으며 극장을 손에 쥐려 한다. 콘텐츠 혁신을 향한 애플의 ‘백 투더 퓨처’의 결과는 어떻게 끝날까.

서킷을 달구는 뜨거운 엔진 배기음이 썰렁하던 극장가를 모처럼 달구고 있다. <탑건: 매버릭>으로 국내 극장가에서 역대급 흥행을 보여준 조지프 코신스키가 연출하고, 할리우드 스타 브래드 피트가 주연한 <F1 더 무비> 얘기다. 지난 6월 개봉한 이후 누적 관객 수 420만 명을 넘겼다. 올해 개봉한 외화 중 처음으로 4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코신스키 감독의 전작인 <탑건: 매버릭>에 빗대 지상에서 벌어지는 탑건이라는 뜻의 ‘땅건’이란 우스갯소리까지 나오면서 ‘N차 관람’으로 이어진 덕이다.

영화 <F1 더 무비> 스틸컷 / 사진출처. 왓챠피디아

영화 <F1 더 무비> 스틸컷 / 사진출처. 왓챠피디아

‘얼마나 많은 관객을 모았는가’라는 단순한 숫자 싸움으로는 <F1 더 무비>흥행이 갖는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이 영화가 흥행뿐 아니라 작품성과 지식재산권IP 측면에서 어떤 성과를 거뒀느냐다. <F1 더 무비>를 두고 레이싱 스포츠가 익숙하지 않은 대중들조차 “오랜만에 극장 간 보람이 있는 영화”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고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웹툰·웹소설 같은 원작이나 별다른 프랜차이즈 IP가 없는 오리지널 영화인 <F1 더 무비>가 한 번 더 빛난다. 실제로 올해 전 세계 흥행 10위권 영화 중 오리지널 스토리는 <F1 더 무비> 단 한 편뿐이다. 미국 박스 오피스 집계 플랫폼 모조에 따르면 이 영화가 전 세계 극장에서 벌어들인 수익은 지난달 말 기준으로 5억9212만 달러에 이른다. 할리우드 역사에 이름을 남길 배우 브래드 피트가 자신의 최고 흥행작 타이틀을 12년 만에 <월드워Z>(약 5억4000만 달러)에서 <F1 더 무비>로 갈아 끼웠을 정도의 대흥행이다. 무려 2억~3억 달러의 천문학적 제작비를 쏟아부었지만, 2차 시장에서 벌어들일 부가 수익을 따질 필요 없이 극장 매출만으로 제작비를 회수하게 됐기 때문이다.

스트리밍만으론 부족하다

<F1 더 무비> 신드롬 뒤엔 애플이 있다. 애플이 자사 온라인 동영상서비스OTT 플랫폼인 애플TV+의 오리지널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 설립한 제작사 애플스튜디오가 제작을 주도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물음표가 생긴다. 왜 애플은 넷플릭스처럼 OTT에 수급할 수많은 오리지널을 ‘양산하는’ 대신 거액을 장르 영화에 사활을 거는 ‘소품종 대투자’ 전략을 취하는 걸까. 왜 굳이 천문학적인 투자로 극장이 아니면 온전히 재미를 즐길 수 없는 ‘극장용 영화’를 만든 걸까. 극장 대체재로 OTT가 떠오르는 마당에 굳이 ‘레드 오션’에 뛰어들 이유가 있는가.

애플이 내놓은 답은 명징하다. 영상 콘텐츠 시장에서 스트리밍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 이 해답의 기저에는 OTT는 극장의 대체재가 아니라 보완재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포화 상태인 글로벌 OTT 시장에서 애플TV+ 신규 가입자 성장세는 가파르지 않다. 업계를 이끄는 넷플릭스가 올 1월 ‘오징어 게임’ 시리즈의 추진력을 얻어 가입자 수 3억 명을 돌파했고, 아마존 프라임도 2억 명이 가입한 것으로 추정된다. 마블부터 디즈니 애니메이션 등 원천 IP 포트폴리오가 풍부한 디즈니+도 1억 명이 넘는 가입자를 확보하고 있다. 반면 애플TV+는 공식적으로 가입자 수를 공개하고 있지 않지만 약 4000만 명 안팎일 것으로 보인다.

애플TV+ / 출처. 한경DB

애플TV+ / 출처. 한경DB

애플TV+의 한계는 라이브러리의 규모에서도 확인된다. 글로벌 엔터테인먼트 분석 회사 패럿 애널리틱스의 ‘콘텐트 파노라마’ 보고서에 따르면 애플TV+의 미국 콘텐츠 라이브러리 규모는 스트리밍 플랫폼 피콕의 12분의 1 수준이다.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콘텐츠가 수급되는 넷플릭스와 비교하면 엄청난 격차다. 이는 출범 초기부터 외부 라이선싱 없이 자체 제작한 오리지널 콘텐츠에 집중해온 애플의 폐쇄적 콘텐츠 전략이 낳은 결과다. 애플은 오래전부터 국제 흐름과 다른 자체 규격을 사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USB-C 타입 대신 독자적인 라이트닝 포트를 11년간 유지한 게 대표적. 압도적인 상품성이 있으면 그곳이 갈라파고스일지라도 고객이 찾아올 것이란 판단이다.

실제로 팀 쿡 애플 최고경영자CEO는 애플TV+를 론칭할 무렵인 2019년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다. “우리는 물량을 좇지 않는다. 가장 큰 플랫폼이 되는 게 아니라, 최고의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우리는 라이브러리를 사지 않고, 오리지널을 만든다.” 아이폰이나 맥북의 화면에 스트리밍되는 플랫폼으로 출발한 만큼, 이 제품들이 기존에 지니고 있는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버리지 않겠다는 뜻이다. 결국 ‘양보다는 질’이라는 측면에서 수준급 독점 콘텐츠들이 만들어졌지만, OTT 시장에서 ‘애플 생태계’를 구축할 만큼의 확장성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레이싱 장면을 위해 카메라까지 개발

애플의 극장용 영화 제작 역시 이런 고품질 프리미엄 전략을 따라 이뤄져 왔다. 리들리 스콧이 메가폰을 잡고 호아킨 피닉스가 주연한 <나폴레옹>과 마틴 스코세이지와 리어나도 디캐프리오가 다시 뭉친 <플라워 킬링 문>이 대표적인 라인업이다. <나폴레옹>은 마치 나폴레옹이 활약하던 시절 유럽으로 시간 여행을 떠난 듯한 장엄한 시각적 연출이 인정받았다. <플라워 킬링 문>은 특유의 작품성과 미장센이 호평받으며 ‘제81회 골든 글러브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받는 성과를 냈지만, 상업적 흥행을 이루지는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F1 더 무비>의 흥행은 애플에 일종의 전환점이 될 수 있다는 평가다. 상업적 흥행을 이뤘고, 장기 상영으로 이어진 데다, 극장에서 스트리밍으로 연결되는 선순환 모델의 가능성도 입증했기 때문이다.

영화 <F1 더 무비> 스틸컷 / 사진출처. 왓챠피디아

영화 <F1 더 무비> 스틸컷 / 사진출처. 왓챠피디아

첫 흥행을 거뒀을 뿐이지만, 영화 시장에서 이미 애플의 존재감은 상당하다. 자본과 기술을 가진 테크 기업이 영화판에 뛰어들었을 때 어떤 혁신이 일어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어서다. <F1 더 무비>는 박진감 넘치는 영상미로 관객을 홀렸는데, 이 촬영에는 아이폰에 활용되는 기술이 들어갔다. 실제 운전자 시점의 레이싱 영상을 담아야 했지만, 극심한 진동과 좁은 공간, 빠른 속도라는 F1 머신의 극한의 환경에서 기존 시네마용 카메라로는 촬영이 어려웠다. 애플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작고 가볍지만, 고성능이라 차체의 공기역학을 해치지 않고, 색감 보정까지 용이한 아이폰 모듈 기반 카메라라는 솔루션으로 난관을 해결했다. 애플 월렛 애플리케이션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미국에선 아이폰 유저에게 영화 관람 할인 혜택을 제공하기도 했다. <F1 더 무비>와 <플라워 킬링 문>, <나폴레옹> 세 작품에만 6억 달러 안팎의 제작비(추정)를 쏟아부을 만큼 자금력을 갖췄다는 점 역시 무기다.

영화 <F1 더 무비> 스틸컷 / 사진출처. 왓챠피디아

영화 <F1 더 무비> 스틸컷 / 사진출처. 왓챠피디아

영화 스튜디오 ‘애플’의 힘

시장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F1 더 무비>를 기점으로 애플 스튜디오가 콘텐츠 제작을 넘어 배급과 홍보·프로모션, 상영 네트워크 확보 등 영화 유통 밸류체인을 구축할지에 쏠린다. 그간 애플은 극장 영화 배급을 파라마운트(<플라워 킬링 문>), 유니버설(<아가일>), 소니 픽처스(<나폴레옹>) 등 시장의 메이저 스튜디오에 배급을 맡겼다. 그러나 최근 들어 영화에 힘을 쏟으면서 자체 극장 배급 진출에 나설 것이란 관측이 커진다.

영화 제작부터 배급까지 손을 대는 애플의 방식은 100년 전 할리우드를 연상시킨다. 당시 파라마운트, MGM 등 메이저 스튜디오는 제작부터 배급, 상영까지 수직 통합해 자사를 거치지 않고서는 영화를 볼 수 없는 공급망을 완성했다. 1948년 미국 연방대법원이 8개의 스튜디오에 대한 수직계열화를 금지한 ‘파라마운트 판결’로 이 독점 구조가 깨지기 전까지 영화판은 메이저 스튜디오만의 세상이었다. 애플이 배급을 통제한다면 수직통합은 더욱 정교해질 것으로 보인다. 파트너와 나누는 수수료를 줄이고 박스 오피스 수익을 더 많이 가져갈 수 있는 데다, 제작 투자 배급 스트리밍 아이폰(전자기기)으로 이어지는 온·오프라인 생태계를 구축해 전통 영화 시장에 대한 강력한 통제권을 지닐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속단하긴 이르다. <F1 더 무비>의 흥행은 애플이 영화판을 흔드는 신호탄인 것은 분명하지만, 후속작이 연이어 극장에서 같은 파급력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의 질주는 일회성 이벤트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영화 <F1 더 무비> 스틸컷 / 사진출처. 왓챠피디아

영화 <F1 더 무비> 스틸컷 / 사진출처. 왓챠피디아

유승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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