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의 밤은 낮보다 우아하다[김선미의 시크릿가든]

1 month ago 12

국내 3대 누각 중 하나로 꼽히는 촉석루.

국내 3대 누각 중 하나로 꼽히는 촉석루.
《논개의 위패를 모신 진주성 의기사(義妓祠) 마당에 대숲이 일렁였다. 평양 부벽루, 경남 밀양 영남루와 함께 국내 3대 누각으로 꼽히는 경남 진주 촉석루 바로 뒤 사당이 의기사다. 임진왜란 중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몸을 던질 때 논개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성 맞은편 남강 변 대숲은 낮에는 겨울 햇살, 밤에는 희고 둥근 달 모양의 조명을 받아 일렁였다. 그 길의 이름은 남가람별빛길이라고 했다. 진주에 다녀온 후 마음속에 내내 대숲이 일렁인다.》

진주 역사와 문화를 집약한 진주성의 일몰. 진주시 제공

진주 역사와 문화를 집약한 진주성의 일몰. 진주시 제공
● 문화가 있어 빛나는 밤 풍경

혹자는 진주의 야경이 체코 프라하보다 예쁘다고 했다. 확실한 것은 진주 사람들에게 심장 같은 존재인 진주성 성곽이 낮보다 밤에 또렷하게 드러난다는 점이다. 진주의 밤을 비추는 조명은 노랑도 주황도 아닌 그 중간 어디쯤의 빛이어서 오묘하게 깊은 맛이었다. ‘이래서 진주 사람들이 진주성 야경을 꼭 보라고 했구나.’ 세계적 건축가 르코르뷔지에를 사사(師事)한 고 김중업 건축가(1922∼1988)가 남긴 경남문화예술회관의 기둥은 전통 건축의 공포(工包)를 형상화해 유독 드라마틱한 분위기를 풍겼다.

고 김수근 건축가가 설계한 국립진주박물관.

고 김수근 건축가가 설계한 국립진주박물관.
진주성 안에는 고 김수근 건축가(1931∼1986)가 지은 임진왜란 전문 박물관인 국립진주박물관이 있다. 지난해 7월에는 승효상 건축가가 설계한 진주대첩역사공원 내 진주성 호국마루도 문을 열었다. 노출 콘크리트로 마감된 계단식 지붕 건물에 대해 지역에서 흉물 논란이 일었고, 승 건축가는 “세월이 지나면 많은 사람의 선의가 덧대어져 건축이 아닌 장소로 변할 것”이라고 맞섰다. 일전에 다른 상황에서 세계적 예술가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논란이 없다면 예술이 아니다.” 아픈 역사만큼 자긍심을 품은 이 문화 도시에 필요했던 건축은 무엇이었을까. 밤의 광장을 걸으며 생각해 본다.

소망진산 유등공원에서 내려다보는 진주의 야경. 진주시 제공

소망진산 유등공원에서 내려다보는 진주의 야경. 진주시 제공

진주의 유등을 항상 볼 수 있는 진주남강유등전시관.

진주의 유등을 항상 볼 수 있는 진주남강유등전시관.
밤의 진주를 느낄 수 있는 명소가 또 있다. 소망진산 유등(流燈)공원이다. 진주성에 오르면 정작 진주성을 바라볼 수 없지만, 이 공원에서는 남강과 진주성, 저 멀리 지리산 천왕봉도 조망할 수 있다. 유등은 진주를 상징하는 빛이다. 매년 10월 열리는 진주남강유등축제는 임진왜란 진주성 전투 당시 왜군이 강을 건너는 것을 막고 가족에게 안부를 전하기 위해 남강에 유등을 띄운 데서 유래했다. 공원 아래 진주남강유등전시관은 그 애틋한 마음을 담은 유등을 연중 볼 수 있는 복합 문화 공간이다. 박선기 작가의 ‘물 위를 걷다’ 작품은 700여 개 아크릴 조각이 바닥에 빛의 그림자를 일렁일렁 드리운다.

● 불탔던 산에 돌을 쌓은 정원

달의 어금니. 월아산(月牙山)은 이름부터 참 곱다. 국사봉과 장군대봉, 어금니 모양을 이루는 두 산봉우리 사이로 달이 떠오른다고 지어진 이름인데 정말로 그 위치로 달이 뜬다. 월아산은 1995년 대형 산불로 산림 30만㏊가 잿더미가 됐던 아픔이 있다. 진주시와 주민들이 힘을 모아 정비해 푸른 숲의 제모습을 찾았다. 월아산의 반전은 계속됐다. 2018년 목재문화체험장을 시작으로 2021년 ‘숲속 어린이 도서관’, 2022년에는 자연휴양림과 산림 레포츠 시설을 확충해 ‘월아산 숲속의 진주’라는 복합 산림 휴양 시설을 갖췄다. 공사 중 나온 월아산 돌들을 시민들과 쌓아 산석(山石) 정원을 만든 사연이 감동이다. 월아산은 애추(崖錐) 지형으로 불리는 암석 퇴적 지형으로 돌들이 곳곳에 있어 이용객 이동에 제약이 많고 산림 휴양 시설 조성에도 애를 먹었다. 진주시는 이 돌들을 애써 들어내지 않고 정원 조성에 활용하는 역발상을 했다. 코로나19 기간 경제적 어려움을 겪은 시민들이 공공 일자리를 얻어 돌을 쌓았다. 온기와 정성이 스며든 돌들을 쓰다듬다가 돌 사이에 핀 진주바위솔을 만나니 반가웠다. 진주바위솔은 지리산과 진주 일대 암석에서 볼 수 있는 우리 자생식물이다.

경남 진주의 복합산림휴양시설인 ‘월아산 숲속의 진주’의 ‘달빛정원’. 시민들이 힘을 합쳐 월아산 암석들을 쌓아 만든 정원의 밤풍경이 일품이다. ⓒ우승민 정원사진가

경남 진주의 복합산림휴양시설인 ‘월아산 숲속의 진주’의 ‘달빛정원’. 시민들이 힘을 합쳐 월아산 암석들을 쌓아 만든 정원의 밤풍경이 일품이다. ⓒ우승민 정원사진가
월아산 숲속의 진주에는 작가정원들이 있다. 지방자치단체가 정원을 조성하면서 너도나도 작가정원을 만드는 게 굳이 필요한가 의문을 가져 왔다. 그런데 이곳 작가정원들은 지역의 역사와 지형을 성실하게 읽어내고 욕심을 덜어낸 게 빛난다. 오픈니스스튜디오가 작업한 정원 ‘청림월연(靑林月淵)’은 바람이 이는 대숲을 거닐며 정원에 앉아 달을 바라보는 선비의 맑은 마음을 담았다. 단정한 정자에 앉으면 월아산에 원래부터 있던 대숲이 시야에 펼쳐진다. 그 숲이 일렁이며 마음의 때를 씻는다.

● 과거를 기억하며 나아가는 도시

진주는 공원의 도시였다. 정원 향기를 품는 공원들의 도시…. 17년간 생활 쓰레기를 야적하던 곳이 도시 재생을 통해 거듭난 초전공원은 생태연못과 메타세쿼이아 숲길이 있는 생태공원이다. 6월 대한민국 정원 산업박람회가 이곳에서 열린다.

진주역 이전 후 남은 시설을 활용한 철도문화공원. 진주시 제공

진주역 이전 후 남은 시설을 활용한 철도문화공원. 진주시 제공
진주역이 이전한 후 남아 있던 철도 시설과 터를 활용해 조성한 철도문화공원에서는 반려견을 데리고 나와 느긋하게 산책하는 사람들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공원에 있는 옛날 열차 안에 들어가 보고, 옛 진주역 차량정비고에서 진주 인물들을 소개하는 문화 전시를 보고, 후피향나무와 맹꽁이 생태공원을 본 뒤 햇볕 잘 드는 ‘메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는 모든 게 좋았다. 카페에 걸려 있는 기다란 금발의 메텔 캐릭터 그림을 보니 어린 시절 TV에서 방영되던 애니메이션 ‘은하철도 999’가 절로 떠올랐다. 진주 ‘노을 맛집’은 진주 서쪽 진양호 공원이다. 아천북카페에서 양마산 둘레길까지 이어진 1.8km의 ‘노을전망 데크로드’가 사랑받는다. 그런데 이번 여행에서는 진주 동쪽에서 노을을 봤다. 지수면 승산리에 있는 지수승산부자마을에 갔다가 관란정(觀瀾亭)에 오른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 700명을 모아 진주성 1차 전투에서 공을 세운 관란 허국주 선생이 은거했던 정자다. 남강으로 저물기 직전 겨울 해가 비추는 관란정 풍경은 마치 황금색 필터를 끼운 듯 따뜻한 색감이었다.

지수승산부자마을은 국내 대표 기업 창업주들이 나고 자라면서 교류한 동네다. LG그룹 공동 창업주이자 GS그룹 창업주인 효주 허만정 본가, LG그룹 공동 창업주인 연암 구인회 생가, 삼성그룹 이병철 창업주의 둘째 누나 이분시 여사가 살던 집 등이 모여 있다. 고즈넉한 한옥마을을 걸으니 어린 시절 창업주들이 돌담길 너머에서 뛰어나올 것 같았다.

이 창업주들이 다녔던 지수초등학교는 리모델링을 마치고 2022년부터 진주 K-기업가정신센터로 활용되고 있다. 운동장에는 이들이 함께 심고 가꿨다는 ‘부자 소나무’가 우뚝 서 있었다. 이 앞에서 사진을 찍으면 부자가 된다는데, 창업가들의 도전 정신을 되새길 수 있는 것만으로 ‘마음 부자’가 된 듯했다. 허만정 창업주의 호를 따서 조성한 공원인 효주원에 향기 좋은 은목서 꽃이 필 때 꼭 다시 와서 걷고 싶다. 진주가 이토록 우아한 곳인지 이제야 알았다.

진주의 맛
◇하연옥 해물 육수를 쓰는 진주냉면의 성지. 마른 명태 머리와 건새우 등으로 맛을 낸 육수에 메밀면을 담고, 채 썬 육전과 지단 실고추 오이 등을 고명으로 얹는다. 바다와 육지 맛이 입안에서 어우러진다.

◇월산닭무국 진주 로컬 맛집. 소고기가 귀하던 시절 소고기 대신 늙은 닭과 무를 넣고 푹 끓여낸 것이 시작이었다고 한다. 시원하고 구수한 국물 맛이 하이라이트. 몸속뿐 아니라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진주식 영혼의 수프’라고 할 수 있겠다.


김선미의 시크릿가든 >

구독

이런 구독물도 추천합니다!

  • 전승훈의 아트로드

    전승훈의 아트로드

  • 최고야의 심심(心深)토크

    최고야의 심심(心深)토크

  • 양종구의 100세 시대 건강법

    양종구의 100세 시대 건강법

글·사진 진주=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

Read Entire Article